•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3) 일본의 동향
  • (2) 해외무역

(2) 해외무역

 실정막부가 확립되기 이전 남북조동란기부터 왜구라고 불리는 일본인 해적집단이 한반도와 중국 연해지방을 침략하는 일이 잦았다. 왜구의 피해를 입은 고려는 물론 명에서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금압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일본은 내란중이었으므로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국내의 통일을 이룩한 족리의만이 조선 태종 원년(1401) 비로소 구주탐제에게 왜구의 단속을 지시하는 한편, 사신을 명에 보내어 왜구가 붙잡아 온 다수의 중국인을 송환시켜 주었다. 이에 응답한 칙서에서 명조는 족리의만을「일본국왕」으로 불렀으며, 족리의만도 다음해 명 성조의 즉위를 축하하는 表文에서「日本國王臣源」으로 자처하였다.

 이리하여 명과 일본 사이에는 조공관계가 성립되고 왜구의 약탈행위를 대신하는 조공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명과의 무역에는 명으로부터 교부된「勘合符」라는 증명서를 반드시 지참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으므로 흔히「勘合貿易」으로도 불리운다. 이후 감합무역은 조공형식에 반대한 4대 장군 足利義持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조선 세종 16년(1434) 6대 장군 足利義政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

 조공무역에서 체재비나 운반비 등은 모조리 명에서 부담하였으므로 일본의 이익이 컸다. 특히 대량으로 수입된 동전은 일본의 화폐유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수출품은 도검·창 등 무기류와 부채·병풍 등 공예품 또는 동·유황 등 광산물이었고, 명으로부터의 수입품은 동전 외에 생사·고급직물·서적·서화 등이었다. 15세기 후반 막부권력의 쇠퇴와 더불어 감합무역의 실권은 차츰 堺商人과 연결된 細川氏와 博多商人과 연결된 大內氏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려에서는 왜구를 격퇴시킨 무장으로도 유명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였다. 조선은 왜구의 금압을 중시하고 일본과의 평화적인 통상을 위해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태조 7년(1398)부터 실정막부도 조선과의 수교에 성의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은 명과의 감합무역과는 달리 처음부터 막부뿐만이 아니라 守護大名·호족·상인 등도 참여하여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조선은 대마도의 宗氏를 통해 통상제도를 정하고 통제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조선무역에 적극적이던 대마도의 宗貞茂가 죽고 왜구의 활동이 재개되자, 세종 원년 조선군이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함으로써 양국의 무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얼마 후 교역이 회복되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의 수출품은 동·유황 등 광산물과 공예품 외에 琉球무역에서 들여온 염료와 향료 등이었고, 조선으로부터의 수입품은 주로 직물류로서 특히 목면은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수요가 많아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유구에서는 이 무렵 北山·中山·南山 세 지방으로 정치세력이 나뉘어져 서로 싸우다가 조선 세종 11년(1429) 尙氏가 이를 통일시켜 유구왕국을 세웠다. 琉球船은 명·일본·조선뿐 아니라 남방의 타이·쟈바·스마트라 등 동남아시아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중계무역에서 활약하였으므로 那覇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교역시장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상인은 蘇木·胡椒·丹木·象牙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특산물을 유구에서 사들여 명과 조선에 전매하기도 하였고, 왜구가 약탈해 온 조선인을 유구에 팔기도 하였다. 薩摩의 島津氏가 유구무역의 특권을 쥐고 있었으나 대마도의 宗氏나 博多의 僧 道安도 유구무역에서 활약하였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해외무역은 주로 실정막부와 대륙국가의 통제에 의해 전개되었으므로 결코 자유무역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생적인 사무역을 압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무역으로부터 획득되는 이익은 막부·수호대명·社寺 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들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堺상인과 박다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여 일본의 상업발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