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4) 동아시아 3국의 관계
  • (1) 왜구

(1) 왜구

 倭寇란 조선인과 중국인이 일본의 해적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15세기 동아시아 3국간의 복잡하고 착종하는 국제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왜구를 주제로 삼아 서술해야 할 것이다. 왜구의 활동에 따른 양국의 대응에 의해 3국간의 국제관계가 규정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며, 이는 동아시아 3국의 국제관계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는 뜻과는 다르다.

 왜구는 활동시기와 성격에 의해 보통 둘로 나눌 수 있다. 14세기 중기부터 15세기 전기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전기왜구와 16세기 중기에 대두하여 수십년간 격렬한 활동을 벌인 후기왜구가 바로 그것이다. 전기왜구의 주체는 글자 그대로 일본인으로, 한반도 및 중국대륙 북부의 연해지방을 침략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반해 후기왜구의 주체는 일본인보다는 오히려 중국인으로서, 침략의 대상도 중국대륙 동남의 연해지방에 집중하여 조선은 이미 왜구의 활동무대에서 벗어나 있었다. 여기서는 15세기에 활동한 전기왜구만을 대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왜구는 충정왕 2년(1350) 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510)≪高麗史≫권 37, 世家 37, 충정왕 2년 2월. 이 때는 아직 중국에서 명이 수립되기 이전으로서 원나라 말기에 해당된다.

 고려와 명에서는 왜구를 단순히 일본인 해적집단으로만 생각하였으나, 그 집단의 구성원은 실로 다양하였다. 물론 악당화한 무사도 있었지만 국내의 名主·莊官·地頭나 무장상인, 농·어민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의 동란기였으므로 왜구의 활동은 거의 단속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조측은 오히려 왜구를 통해 재원을 조달받고 있는 측면도 있었다. 왜구의 규모는 배 2, 3척의 소집단으로부터 4백여 척에 3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린 대집단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왜구는 주로 미곡 등 생활필수품의 획득을 노려 고려의 조운선이나 식량창고를 습격하였다.

 왜구는 처음 고려의 연해지방을 습격하다가 차츰 행동반경을 넓혀 경기지방까지 침략하였다. 당시 중국대륙의 원말 동란과 연동하여 고려도 내우외환에 시달렸으나, 사신을 몇 차례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의 금압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외교적 방법으로 왜구를 금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실정을 간파한 고려는 우왕 이래 격화된 왜구의 침입을 군사력으로 적극 퇴치하기로 하였다. 해군을 거느린 鄭地 등이 왜구토벌에 분전하였으며, 창왕 원년(1389)에는 朴葳가 병선 백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3년 후 고려가 무너지고 이성계 등에 의해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조선 태조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입각하여 더욱 海防태세를 갖추는데 힘썼다.

 왜구의 침략이 중국대륙의 연해지방까지 확산되어 나가자 명 태조도 征西將軍 懹良親王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시키고 명에 조공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명은 일본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고 북조를 옹호하는 장군 足利氏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경도의 족리씨에게 교섭을 시도하였다. 족리씨의 室町幕府는 명과의 정상적인 무역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므로 왜구를 금압할 의지는 있었으나, 당시 九州지방은 남조측의 세력범위였기 때문에 유효한 수단을 강구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왜구는 고려와 명에 대한 침략을 되풀이하였지만, 고려에 대한 침략이 격화될 때는 명에 대한 침략이 감소하고, 반대로 명에 대한 침략이 격화될 때는 고려에 대한 침입이 줄어드는 상관관계를 나타내었다.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곳은 주로 山東반도 일대였으나, 피해 범위가 江蘇·浙江·福建·廣東지방으로까지 차츰 넓어져 갔으며 미곡과 인민의 약탈이 목표가 된 것도 고려와 마찬가지였다. 명 태조는 對日斷交를 결심하고 연해지방을 따라 75개 성을 쌓는 등 해방태세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중국인의 해외 渡航을 엄금하고 외국선박도 조공선 이외에는 중국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엄격한 海禁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足利義滿이 장군이 되고 나서 남북조의 통합을 이루고 명과의 조공무역을 위해 왜구의 단속을 강화시켜 나가자, 한때 극성을 부렸던 왜구의 활동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왜구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조선 세종 원년(1419) 30여 척의 왜구가 요동반도의 望海堝에서 명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데다가, 같은 해에 이루어진 조선의 대마도 정벌에 의해 왜구의 본거지가 소탕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른바 전기왜구의 활동은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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