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4) 동아시아 3국의 관계
  • (4) 명의 조선견제정책

(4) 명의 조선견제정책

 명조가 수립되자 명 태조와 고려 공민왕은 새로운 冊封관계를 신속하게 성립시켰다. 원을 타도하고 배척하려는 목표가 일치되었던 만큼 공동의 이익을 위해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인 나하추를 소탕하려는 과정에서 명 태조가 나하추와 고려의 통모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명 태조가 신임하였던 공민왕이 암살되고 명사 피살사건까지 계기적으로 일어난 데다 고려가 북원과도 통교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명 태조는 고려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감추려하지 않았으며 양국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어 갔다.

 명 태조는 이후 고려에 대해 왕위의 계승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든지 무리한 歲貢을 요구하여 성의를 시험하려 들기도 하고, 貢路를 폐쇄시켜 조공을 못오게 한다든지, 대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정벌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고압적인 정책을 구사하며 고려를 견제하였다. 요동의 나하추를 평정하자 철령위설치를 시도하여 고려와 여진의 연결가능성에 쐐기를 박고자 하기도 하였다. 명 태조의 이러한 위압정책은 고려를 이은 조선왕조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명 태조가 사망하는 조선 태조 7년(1398)까지 30년간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명 태조는 조선의「聲敎自由」를 확인하며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을 의사를 분명히 하였으나, 조선의 여진유인과 요동진출에는 극도로 민감한 대응을 하였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던 명 태조는 일부 조선해적의 활동 때문에 더욱 조선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 태조는 조선이 요동으로 군사적 진출을 감행할지도 모르며 그 계획의 중심인물이 鄭道傳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때마침 발생한 表箋問題를 구실로 조선을 위협하며 정도전을 명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고자 기도하였다. 이 무렵 명 태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을 정벌하겠노라고 공갈하였으나, 실제로 그러한 의도나 준비는 전혀 없었으며 다만 조선이 요동으로 먼저 진출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조선을 불신하고 위협하던 명 태조는 조선 태조 7년에 사망하고, 잇따라 조선에서는 요동정벌을 주도하던 정도전·南誾 등의 세력이「왕자의 난」으로 몰락하였다. 명과 조선 양국에서 서로를 혐오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던 세력이 동시에 사라짐으로써 양국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명 태조를 이어 황제가 된 명 혜제는 관대한 문인정치를 지향하였으나, 중앙집권에 이미 위협적인 존재가 된 諸王세력을 삭감시키기 위해 削藩정책을 시도하다가 숙부인 燕王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3년간의「靖難의 役」기간에 조선은 명 혜제나 연왕의 어느 한편에 적극 협력하지 않고 정세를 관망하면서, 입장이 현저히 약화된 명 혜제로부터 몇 가지 외교적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즉 조선왕조 창건 이래 명 태조로부터는 받지 못하고 있던 조선국왕의 誥命과 印信을 받게 됨으로써, 조선왕조 수립의 형식적 완결과 태종즉위의 합법성을 확인받게 된 셈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명 태조의 고압정책에 시달려오던 조선에게는「정난의 역」이 다소 불안한 요소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기간에 명 혜제의 회유정책으로 잠시 고무되었다. 그러나 이는 명의 일관된 조선견제정책에서 극히 짧은 예외에 지나지 않았다.

 「정난의 역」으로 제위에 오른 명 성조는 적극적인 대외확장정책을 추구하였으며, 그 가운데 요동의 여진을 초무하는 과정에서 조선과의 사이에 다시 긴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내란에 의해 제위에 오름으로써 정통성에 약점이 있는 명 성조에게 기민하게 賀登極使를 파견하여 순탄한 관계수립에 성공한 조선으로서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셈이었다. 조선은 조선에 복속되어 있다고 생각해온 일부 여진부족에 대한 명 성조의 초무에 대하여 내심으로 크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정세의 추이를 일찍이 간파한 權近은 태종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전하께서 온갖 충성을 다해 사대하는 정성으로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믿고 계시지만 황제는 동쪽 변두리에 建州衛를 설치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목을 조르고 오른팔꿈치를 잡아당기는 셈입니다. 밖으로는 雄藩을 세워 우리 인민을 유인하고, 안으로는 남다른 은총을 베풀어 우리의 방비를 늦추고 있으니 그 뜻을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8월 경술).

 당시 鳳州부근에 거주하던 오랑캐의 於虛出(阿哈出)이 명의 覊縻衛所로서 설치된 건주위의 도지휘사가 되어 명의 요동경략에 협력하기 시작하자, 조선은 吾音會(會寧)에 있던 吾都里 부족을 계속 조선의 세력권에 묶어두기 위해 온갖 공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후일 淸나라 황실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오도리의 童猛哥帖木兒[퉁멍거티무르]는 결국 명 성조의 집요한 공략에 굴복하여 명에 입조하고 말았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관할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암투는 요동진출과 같은 성질의 분쟁은 아니었지만 명의 견제정책에 조선은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명 성조의 요구에 따라「정난의 역」 기간에 조선으로 피난 온 漫散軍民조차 모조리 송환시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친정에 나섰던 명 성조의 사후 인종이 즉위하였지만 불과 10개월만에 병사하고 그의 아들 선종이 계위하였다. 명 인종과 선종의 재위기간은 모두 10년 남짓이었으나 정치 및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여 이른바「仁宣의 治」를 연출하였다. 이는 그 동안의 대외정책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확장정책의 축소조정에 따라, 국가재정의 막대한 지출을 감소시킬 수 있었

 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명 성조 이래 직접 통치해오던 安南을 방기하였고 대규모의「西洋出使」와 몽고정벌을 중지하였으며, 흑룡강 일대에 설치된 奴兒干都司의 경영도 느슨하여졌다. 말하자면 명 성조시대 대외정책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요동의 여진에 대한 장악력이 쇠퇴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한 견제정책도 약화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명 선종과 그의 뒤를 이은 명 영종대는 바로 조선의 세종대에 해당한다. 세종은 바로 명의 여진장악력이 약화되어 가는 배경 속에서 여진의 閭延침략에 대한 응징을 이유로 세종 15년(1433) 압록강을 넘어 婆猪江(佟佳江)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건주위의 李滿住를 토벌하였다. 아무리 女眞衛所라 할지라도 명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건주위를 명에 예고도 없이 토벌을 감행한다는 일은 명 성조대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건주위토벌에 분개한 요동총병관 巫凱가 명 선종에게 조선을 문책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명 선종은 “遠夷가 다투고 싸우는데 시비가 분명치 않으니 어찌 한 쪽의 주장만을 들을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이를 기각하였다.512)≪明宣宗實錄≫권 103, 宣德 8년 6월 계미. 명 성조가 여진을 독점적·배타적으로 확실히 장악하려 했던 데 비해, 명 선종이 지녔던 소극적인 자세가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잇따라 발생한 여진의 내분으로 建州左衛의 퉁멍거티무르 부자가 함께 피살되고 오도리의 건주좌위가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자, 세종은 이를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두만강유역의 6진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세종은 동왕 19년 다시 한 차례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이만주의 토벌을 단행하여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함으로써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이르는 강역을 확정지을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이러한 점진적인 북방개척을 가능케 해준 것은 조선의 국력충실에도 기인하지만, 명의 대외정책 전환에 따른 요동에서의 명세력 쇠퇴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이라트의 세력이 흥기하고「土木의 變」으로 명이 남경천도까지 고려할 만큼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자연히 요동경영도 과거와 같은 박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여진에 대한 통제력도 더욱 이완되어 갔다. 이러한 틈을 타서 建州女眞과 海西女眞이 명의 장악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며 때때로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명은 이제 스스로 자국의 위소로 편입되어 있는여진을 토벌하는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은 이제 조선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진을 견제하는데 조선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遼東都司가 군대를 내어 건주위를 토벌하던 세조 13년(1467) 명의 요청을 받은 조선에서도 군대를 출동시켜 이만주 부자를 잡아죽인 일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명의 조선견제정책은 이제 막을 내리고 우호적이고 정상적인 조공관계가 전개되어 나갔다. 이후 조선과 여진과는 거의 교통이 단절되다시피 관계가 소원하여졌으며, 여진내부에서는 치열한 내부항쟁을 거치며 차츰 건주여진의 패권이 확립되어 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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