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가 수립된 해는 明太祖 洪武 25년(1392)에 해당되는데, 이 때는 명이 건국되어 고려와도 통교를 시작한 지 이미 4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대명관계는 고려말 대명관계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고려말 우왕 14년(1388) 威化島回軍 이후에 확립된 대명정책의 틀이 사실상 조선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대명관계에서 고려말과 조선초를 한 시대로 묶어 파악하게 되는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으로부터 조선 태조 7년(1398)까지 31년간 지속되었던 명 태조 홍무정권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고려와 명의 관계와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체로 모두 명 태조 홍무정권의 대외정책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태조 재위 7년간의 대명관계는 그 이후의 대명관계보다도 오히려 그 이전인 고려 공민왕 17년 이래의 대명관계와 전개양상이 유사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대명관계와 대명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말의 대명관계를 간략하게나마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가 명과 冊封관계를 성립시킨 것은 명조가 수립된 직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공민왕 18년 명 태조가 符寶郎 偰斯를 고려에 파견하여 명조의 수립을 통고하였을 때 元末의 동란을 틈타 반원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은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공민왕은 원의「至正」 연호를 즉각 폐지하는 한편, 禮部尙書 洪尙載와 監門衛上護軍 李夏生을 賀登極使로 南京에 보내고 명 태조에게 封爵을 요청하였다. 이들을 맞은 명 태조 역시 크게 기뻐하며 공민왕을 고려왕에 봉한 다음, 다시 偰斯로 하여금 金印·誥文·大統曆을 고려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를 받은 고려는 명의「홍무」연호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명과 고려의 책봉관계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원을 타도하고 배척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던 명과 고려 양국은 참으로 신속하고도 적극적으로 우호적인 양국관계를 성립시켰다.
공동이익과 상호신뢰에 바탕을 둔 초기의 이러한 우호관계는 명이 요동의원나라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경략하고자 기도하는 과정에서 바뀌어 고려와 명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요동에는 納哈出[나하추] 등 원의 잔여세력이 남아 있어 명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고 있었다. 나하추는 공민왕 21년(1372)에 요동진출을 위한 명의 군사보급기지이던 牛家莊을 습격하여 10만 석의 군량을 불지르는 등 명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명 태조는 나하추의 이 우가장 습격사건에 고려가 공모하였다고 확신하고, 노골적으로 고려를 비난하며 앞으로 조공을 3年 1使로 할 것과 사행도 요동을 경유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요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공민왕 23년에 명 태조의 신뢰를 받았던 공민왕이 암살되고, 귀국 도중의 명사 林密과 蔡斌을 호송하던 密直副使 金義가 채빈을 살해하고 임밀을 포로로 하여 나하추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계기적으로 발생하였다. 더욱이 고려가 北元과도 통교를 계속하는 양면외교를 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명 태조는 이로부터 고려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오랫동안 떨치지 못하게 되었고 양국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어 갔다.
명 태조는 우왕의 습위를 승인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면, 무리한 歲貢을 요구하여 고려의 대응을 시험하려고 하였으며,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정벌하겠다는 위협을 여러 차례 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12년이 지나서야 당초 貢額에 대한 명의 양보와 고려의 성의표시에 따라 5년간의 공액을 한꺼번에 보내는 방식으로 세공문제가 해결되면서 교착된 양국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 명은 우왕의 습위를 승인하고 억류시켰던 고려사신을 송환하는가 하면, 공액도 삭감하니, 이로써 양국관계의 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명은 왜 이 시점에 와서 고려에 대한 종전의 위압자세를 버리고 서둘러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을까. 이는 명의 요동경략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체로 명의 대고려정책은 무엇 하나 요동의 정세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명이 고려와 그 동안 불편했던 관계를 개선하려고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한 우왕 11년(1385)은 바로 명 태조가 나하추를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하는 때와 일치된다. 따라서 명 태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고려의 명에 대한 적개심올 누그러뜨려 나하추와 연합할 가능성을 없애며, 나하추 정벌에 필요한 戰馬를 고려로부터 사들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우왕 13년 명은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나하추를 평정하여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을 일소시킴으로써, 이제는 고려와 국경이 부분적으로 맞닿을 수 있을 정도로 요동진출이 가능해졌다. 명 태조는 요동경략에 최대의 장애를 제거하고 나자 의욕적으로 요동진출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명 태조는 지금까지 고려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돌변시켜 앞으로 고려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遼東都司에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鐵嶺衛설치를 통고함으로써, 이미 反明의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던 고려조정에 충격을 주었다. 명의 가중되는 압박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모색하여 오던 崔瑩은 요동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최영에게 설득당한 우왕은 李成桂의 四不可論을 물리치고 최영을 八道都統使, 曹敏修를 左軍都統使, 이성계를 右軍都統使에 임명하고 요동정벌을 위한 出師를 단행하였다. 마지못해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마침내 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방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는 한편, 최영을 유배시킴으로써 고려의 정국을 일변시켰다. 요동정벌운동과 함께 중지시켰던「홍무」연호가 회복되고 胡服의 착용이 다시 금지되었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실각시킨 후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고려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명의 철령위 설치기도가 고려에 정변을 불러 일으키고 후일 조선왕조 개창의 길을 열어놓게 되는 하나의 단서가 된 것이었다. 이후 고려에서는 이성계 일파의「化家爲國」의 기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명의 견제와 간섭을 끌어들이려는 李穡·鄭夢周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명 태조의 냉담한 내정 불간섭정책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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