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1) 대명정책
  • (3) 대명외교의 성격

(3) 대명외교의 성격

 조선왕조의 대명관계는 사대외교를 통해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조선이 명과 전근대 동아시아적 국제질서의 일환으로서 전형적인 조공관계를 맺고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외교형태였다. 사대외교를 흔히 사대주의와 혼동하여 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대외교는 어디까지나 민족보전을 위한 현실적 외교정책으로서 결코 자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518)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89), 181쪽. 조선 초기의 대명 사대외교는 역시 고려말 이른바 친명파의 논리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우왕 원년에 북원의 사신이 江界에 이르렀을 때,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친원파와 친명파가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때 朴尙衷은 强을 등지고 弱을 향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하여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이 사리와 대세에 어긋남을 역설하였다. 우왕 14년(1388)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던 이성계가 내세운 4불가론의 첫머리가「以小逆大」였으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이키기를 청원하였던 조민수도「以小事大 保國之道」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당시의 대명 사대외교는 결국 국제정세를 통찰한 결과「保國之道」 즉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선택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에는 적극적인 친명파였으며 조선왕조의 개국원훈이기도 한 정도전은 대명 사대외교에 앞장 선 인물로서 조선 태조 2년(1393)에는 사은사로 명에 다녀온 바도 있다. 그러나 정도전은 누구보다도 민족적 자존심과 주체성을 강조하며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고, 요동정벌을 추진할 때도 조선 태조에게 “지난날 外夷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자”들의 사례를 들어 설득하는 대담한 발상을 하고 있음이 특히 주목된다. 이는 정도전에게 의례적인 사대외교정책과 실질적인 부국강병정책이 전혀 모순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權近 또한 사대외교의 상징적 인물로서 간주될 수 있다. 表箋問題로 인한 갈등을 해소시킬 목적으로 자진하여 명에 간 권근은 文淵閣에서 늘 태조의「回軍之義」를 들어「事大之誠」을 강조하였다. 명 태조가 명제를 내어 짓게 한 시인「王京作古」·「李氏異居」·「出使」 등 18수에서도 사대의 성의를 드러냄으로써 명 태조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519)權近,≪陽村集≫권 1, 應製詩. 그러한 권근이 명에「靖難의 役」이 일어나 3년간의 내전에 휩싸였을 때, 요동의 定遼衛가 燕王軍에 패퇴하여 조선에 투항하여 올 경우를 가상하고 이를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정종에게 권고하였다. 그 이유는 지금 明惠帝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는 “연왕이 만약 난을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에게 죄를 물으려고 할 것인데 그 때는 어떻게 대응하겠는가”520)≪定宗實錄≫권 4, 정종 2년 5월 신사.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은 조선왕조가 수립된 이래 그 때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던 誥命과 印信을 명 혜제로부터 받아내어 책봉체제를 완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사대외교가 맹목적인 대국추종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정난의 역」의 결과 연왕이 승리하여 새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태종은 기민하게 새로운 永樂政權을 대상으로 사대외교를 펴 명의 사신을 접견하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영락정권의 성립과 明成祖의 즉위를 예찬하는 外交辭令을 남발하였다. 그러나 명 성조가 요동의 여진을 본격적으로 초무하기 위해 두만강유역까지 손길을 뻗쳐오자 명과 조선과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조선은 두만강유역의 여진이 원래 조선에 속하여 있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특히 나라의 울타리로서 吾都里의 존재를 중시하고 있었다. 독자적으로 여진을 초무하는 데 한계에 부딪친 명 성조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협력을 완곡하게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河崙·趙英茂에게 사신이 오는 것은 오직 童猛哥帖木兒[퉁멍거티무르]를 초무하기 위함인데 그는 동북면의 울타리이니 대책을 세우라고 하며 양보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태종은 명에 대한 표면적인 사대외교와는 별도로 오도리 등 여진을 조선에 계속 붙들어 두기 위해 명 성조와 각축을 벌였던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조선 초기의 사대외교는 적어도 중기 이후 주자학이 풍미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慕華的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주변 국가들을 책봉체제에 편입시켜 중국적 세계질서를 형성하고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한편 주변 국가들은 책봉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에 조공함으로써 자국의 국가안보를 보장받고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며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미 중국에 의해 책봉체제로 규정된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은 불가피하게 현실적인 사대외교를 통해 실질적인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대명정책을 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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