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2) 사신의 왕래
  • (1) 조공횟수의 문제

(1) 조공횟수의 문제

 조선왕조가 수립되고 나서도 명과의 조공관계는 그대로 지속되었으므로 양국 사이에는 여전히 빈번한 사신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은 정치적 목적과 함께 경제적·문화적 이익을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사절을 파견하고자 하였다. 해마다 신년에는 賀正使, 황제의 생일에는 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에는 千秋使를 파견하는「一年 三使」가 정기적 사행이었다. 그 밖에도 각종 명목의 비정기적 사행이 있었으므로 사실상 조선은 매년 3회 이상의 사절을 명에 보낸 셈이었다.

 그런데 태조 2년(1393)에 明使 黃永奇와 崔淵이 조선에 전달한 手詔 속에서 명 태조가 이른바「生釁」과「侮慢」 5개조를 열거하며, 조선측이 말썽을 일으키며 명을 업신여기고 있다고 책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태조는 즉각 中樞院學士南在를 파견하여 이에 대해 해명하게 하였다. 뒤이어 성절사 金立堅과 사은사 尹思德 일행이 遼陽城 밖 白塔에서 명 태조가 이미 내린 명령에 의해 입국을 거절당하고 그냥 돌아왔다. 명 태조가 화를 낸 원인의 핵심이「여진유인」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선은 요동으로부터 도망하여 나온 여진인 400여 명을 李至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였으나, 請通朝路表를 지닌 이지 역시 입국을 못한 채 헛되이 돌아왔다. 심지어 입국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에 명에 들어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던 사은사 이염조차 요동에 이르러 역마의 지급을 받지 못하여 걸어서 귀국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 무렵「生釁」과「侮慢」을 해명하기 위해 奏聞使로 명에 갔던 남재가 귀국하여, “네가 돌아가거든 3年 1貢하도록 그에게 일러라. 너희들의 성의를 보아 가며 내가 사람을 보내 너희를 부르도록 하겠다”라는 명 태조의 의사를 전하여왔다.521)≪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9월 갑진. 태조는 중추원학사 李稷을 사은사로 다시 파견하여 예전대로 조공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직도 백탑에 이르러 입국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직보다 먼저 출발하였던 천추사 朴永忠과 조금 늦게 출발한 하정사 慶儀도 모두 요동에서 입국하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조선의 1년 3사에 대하여 명은 3년 1사를 요구하는 이른바「貢期」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명 태조의 조선사신 입국금지는 여진유인과 더불어 퍼지고 있는 요동정벌에 관한 소문과 조선해적의 중국연안 침입사건 등 조선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보다 완전한 조선의 굴복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서, 결코 국교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 21년 전인 공민왕 21년(1372)에도 명 태조는 고려가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인 나하추와 내통하여 牛家莊의 명군 군량창고를 습격하였다는 의혹 등을 계기로 유사한 조치를 내린 적이 있었다. 명 태조는 고려에게 앞으로는 3년 1사를 하되 해로를 경유하여 오도록 요구하며 요동에서 고려사신의 입국을 일시적으로 막았던 것이다.522)末松保和,<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關係>(≪靑丘史草≫1, 笠井出版印刷社, 1965), 328∼345쪽. 결국 명 태조가 내린 사신의 입국 금지조치와 3년 1사 요구는 조선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응징의 의미와 함께 앞으로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거의 1년간 단절되었던 양국관계는 태조 3년에 드디어 명 태조가 앞서 언급한 대로 명사 최연과 황영기를 잇따라 조선에 보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명은 말 1만 필을 보내줄 것과 조선 태조의 장남 또는 차남이 조선해적사건의 범인을 직접 압송하여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동안 사신의 입국금지로 크게 당황하였던 조선은 성의를 다하여 500필씩 또는 1,000필씩 馬匹을 요동으로 보내는 한편, 知中樞院事 조반과 參贊門下府事 남재를 동행시켜 靖安君 李芳遠을 명에 보내 해명케 함으로써 그 동안의 현안문제를 마무리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방원이 출발하고 나서 謝許通朝路使 李茂, 하천추절사 鄭南晋, 하정사 閔霽, 사은사 이직이 같은 해에 잇따라 명에 입국함으로써 1년 3사를 바라는 조선의 희망이 관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기문제는 태조 6년에 세번째의 表箋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한 차례의 파동을 겪게 되었다. 명은 천추사 柳灝를 억류하고 표전의 작성자를 압송해 오도록 요구하는 한편, 앞으로 조공은 3년마다 한 차례만 보낼 것을 다시 요구하여 조선조정을 경악시켰다. 이 때도 명이 3년 1사를 요구하는 까닭이 마치 표전문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으나, 사실은 조선의 요동정벌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시점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선과 명 사이의 공기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태조 7년 5월에 명 태조가 죽고 손자 명 혜제가 즉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의 몰락과 함께 태조가 퇴위하고 정종이 즉위하는 커다란 격변이 양국에서 동시에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태조의 퇴위를 알리고 정종의 즉위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偰長壽를 計禀使로 삼아 명에 보냈다. 그리고 명 태조의 사망과 명 혜제의 즉위를 알리는 예부 자문의 도착에 따라 金士衡을 賀登極使로, 河崙을 陳慰進香使로 명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계품사 설장수는 遼東都司에서「3년 1사」를 이유로 통과시켜 주지 않자 일단 의주로 돌아와 사절의 명칭을 진향사로 바꾼 다음, 김사형·하륜과 합류하여 명에 입국하였다.

 명 혜제는 이 때도 정종의 즉위만 승인하였지 1년 3사는 허락하지 않았던 듯하다. 왜냐하면 정종 원년(1399)에 하정사와 성절사가 파견된 기사가≪朝鮮王朝實錄≫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종 2년 8월에 처음으로 성절사를 파견하고 9월에 하정사가 파견되었으며, 이후에 황태자가 아직 없어 보낼 필요가 없는 천추사를 제외하고 하정사와 성절사가 매년 파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 6년(1397) 이래의 3년 1사가 정종 2년부터 1년 3사로 다시 회복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조선은 후일 중종 26년(1531)부터 冬至使가 추가되어 1년 4사가 되기까지 1년 3사의 정기적 사절을 중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진 조선에 대한 建文政權의 대응정책이 홍무정권과는 확연하게 구별될 정도로 달라진 점에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정종 원년에 연왕이 이른바「정난의 역」을 일으켜 명 혜제에게 반기를 들고 공격하는 내전이 발발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건문정권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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