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2) 사신의 왕래
  • (3) 사행의 노정

(3) 사행의 노정

 조선사절은 주로 육로를 이용하여 명의 수도에 왕래하였으나, 시기에 따라서는 해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요동과 요서지역의 정세가 평온하면 육로를 이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해로를 선택하였다. 따라서 중국에 서 원과 명의 왕조교체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여전히 원의 잔여세력이 요동에 남아있던 14세기말과 여진족이 발흥하던 명말의 동란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초에는 불가피하게 해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세종 3년(1421)에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명의 수도였던 남경에 왕래하는 데는 조난사고만 제외한다면 사실상 해로가 더욱 편리한 점이 많았다. 해로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요동반도의 旅順口까지는 육로로 간 다음 배로 산동반도의 登州로 건너가서 다시 육로로 남경으로 가는 경로였다. 그러나 북경천도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육로가 기본적인 사행로가 되었다.

 조선의 한양으로부터 육로로 명의 북경에 이르는 사행로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漢 陽∼義 州

 2단계:義 州∼遼 陽

 3단계:遼 陽∼山海關

 4단계:山海關∼北 京

 한양으로부터 의주까지는 開城-黃州-平壤-安州-定州의 길로 갔으며, 의주에 도착하면 義州館에 여장을 풀고 며칠을 묵으며 입국준비를 하였다. 의주로부터 요동도사가 있는 요양까지는 鎭江城-湯站堡-鳳凰城-鎭東堡-鎭夷堡-連山關-舌甘水站-狼子山站의 이른바 東八站을 거치는 코스로서, 4단계 가운데 거리는 가장 짧지만 험난한 코스였다.

 요양은 명이 요동을 경영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중심으로서, 보통 약칭으로 요동도사로 불리는 遼東都指揮使司가 위치하여 25衛와 2州를 관할하였다. 요동도사의 우두머리인 요동도지휘사는 조선사신을 접견하여 연회를 베풀고, 千戶나 百戶를 伴送使로 임명하여 조선사절을 북경까지 안내하도록 하는 것이 상례였다.

 요양으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길은 鞍山-海州-牛家莊-沙嶺-高平-盤山-廣寧-閭陽-十三山-小凌河-杏山-連山-曹莊-東關-沙河-高嶺을 거쳤다. 요양으로부터 광녕까지는 평원지대나, 광녕으로부터 산해관까지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산해관을 통과하면 深河驛-撫寧縣-永平府-七家領驛-豊潤驛-玉田縣-蘇州-三河縣-通州를 거쳐 북경에 도달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조선사절은 예부 主客淸吏司의 접대를 받고 會同館에 인도되어 대개 40여 일 정도 유숙하였다. 入館한 이튿날 조선사절은 공복을 갖추어 입고 예부로 나아가 禮部尙書에게 자문을 전달하고, 다시 儀制司로 가서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황제알현을 鴻臚寺에 요청하면 조회가 있는 날을 기다려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사신일행은 조회가 있는 당일에 홍로시의 안내를 받아 午門 밖에서 황제가 임어하기를 기다린 다음 오문으로 들어가 문무관원의 반렬 뒤에 서 있다가, 조회가 끝나면 앞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하고 使命을 말하였다.524)金九鎭,<朝鮮前期 韓中關係史의 試論>(≪弘益史學≫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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