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3) 무역
  • (1) 교역의 형태

(1) 교역의 형태

 조선과 명 사이의 무역도 양국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기본적 질서인 朝貢관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공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적 관계뿐 아니라 경제적·문화적 관계까지도 포괄하는 국제질서였기 때문이다. 원래 조공이란 중국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주위의 민족이나 국가가 사신을 보내 일정한 공물을 바치면, 중국의 황제는 回賜品 또는 賞賜品을 내려주는 경제적 행위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의 국가들은 조공관계의 수립을 통해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한 중국으로부터 필수물자를 획득하고 선진문물을 도입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중국의 대외관계가 모든 시대에 걸쳐 조공관계로만 일관되지는 않았으나 명대에 조선과의 사이에서는 전형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527)全海宗,≪韓中關係硏究≫(一潮閣, 1970), 50∼54쪽. 따라서 이 시대에 양국간의 무역도 조공관계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조공무역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헌과 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조공무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근대적인 국제무역과는 물론 성격이 다르지만, 조공관계라고 하는 특수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물자의 교역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공무역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조선과 명의 공무역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려말의 대명관계에서 비롯된 양국관계의 전개양상을 이어받고 있다. 고려말과 조선초에 걸쳐 존재하였던 홍무정권과의 갈등관계가 명 태조의 사망과 건문정권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양국의 공무역도 비로소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조공을 1년 3사로 할 것인가 아니면 3년 1사로 할 것인가의 이른바 貢期문제가 정종 2년(1400) 조선의 희망대로 1년 3사로 낙착된 것도 양국관계의 해빙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지표였다. 다음해에는 명 혜제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부여

 받음으로써 책봉관계의 형식적인 완결이 이루어지며 조선의 대명무역도 더욱 뒷받침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세종 11년(1429)에는 양국간의 오랜 현안문제 가운데 하나였던 金銀歲貢이 면제되고 다른 품목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조선의 대명무역은 완전히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조공무역이라는 일종의 공무역 이외에 사무역과 밀무역도 무역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였다. 공인되지 않은 밀무역은 조선 후기에 비하여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자료도 남아있지 않아 이를 고찰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지만 사무역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대명사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공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점은 공무역과 마찬가지로서 어느 정도 고찰이 가능하다.

 조선 중기인 16세기가 되면 상업의 발달로 말미암아 새로이 성장한 富商大賈들이 宮禁·權臣들과 결탁하거나 역관·군관으로 가장하는 특권무역의 형태로 공무역체제를 내부로부터 해체시키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공인되면서, 그 동안의 특권세력에 기생하는 형태를 벗어나 八包貿易이나 柵門貿易 등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528)韓相權,<16世紀 對中國 私貿易의 展開>(≪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3). 그러나 이보다 앞선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상인들의 자본축적이 아직 미흡한데다 자유로운 사무역이 법제로서 엄금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공사절에 부수되는 미미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에 명에 가는 사신이 개인적으로 潛商의 성격을 띠거나, 상인이사신의 노비로 가장하여 교역할 물화를 가지고 가다가 발각되어 처벌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사무역의 존재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공조참의 李揚은 세종 5년 명에 사신으로 갈 때 규정된 이상의 물품을 가지고 가다가 적발되었는데, 소지한 상품이 苧布·麻布 44필과 貂皮 60장이었다. 이양은 상인 孫錫을 자신의 종으로 가장시켜 데리고 갔는데, 손석은 저포·마포 237필, 초피 200장, 인삼 12근, 진주 2냥을 소지하였다. 또한 留後司에 소속된 상인 朴獨大도 종으로 가장하여 적지 않은 상품을 가지고 갔는데, 이들에게 개인적인 교역을 위촉한 사람들이 다수의 권신들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아, 손석과 박독대를 종으로 가장시킨 행위가 이양의 단독행위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529)≪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0월 을축·병자.

 16세기 이후가 되어 보편화되는 이러한 형태의 사무역은 당시만 하더라도“謀利하는 마음이 장사꾼과 같아 염치를 땅에 떨어뜨렸고 士風을 더럽게 물들였다”고 비판받고 처벌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헌부에서는 이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평안도감사·首領官·의주목사·판관·감찰 등을 함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이 시기 사무역의 존재양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 초기의 대명무역은 역시 공무역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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