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3) 무역
  • (3) 특수한 교역

(3) 특수한 교역

 일반적인 사신왕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교역 이외에, 양국간에는 어느 일방의 필요에 의해 때때로 특수한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물론 공무역의 범주에 포함된다. 양국은 정치·군사적 또는 경제·문화적으로 절실한 필요성이 발생하면, 따로 특수한 사명을 띤 사신을 파견하여 상대국에 교역을 요청하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교역에는 명의 마필·耕牛교역과 조선의 서책·약재교역이 있으나, 주로 마필교역과 서책교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마필교역은 일찍이 고려말 명과 耽羅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부터 진헌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명은 북원을 정벌하거나 요동의 나하추를 토벌하는 등 대규모 원정이 단행될 때마다 반드시 고려에 마필의 진헌을 요구하여왔다. 조선 초기에도 이러한 관례가 한동안 지속되었으며, 태조 6년(1397)부터 세종 11년(1429)까지 58,611필이 명에 진헌되었다.532)南都泳,<麗末鮮初 馬政上으로 본 對明關係>(≪東國史學≫6, 1960), 55∼56쪽.

 조선 초기에 마필교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태종년간의 예를 하나 들어 보기로 한다. 명이「정난의 역」으로 내전이 한창일 무렵 명 혜제는 반년 전에 조선을 다녀온 陸顒에게서 말이 생산되는 조선으로부터 綺絹으로 良馬를 산다면 전쟁에 대비할 수 있다는 건의를 받고 조선의 時價대로 교역을 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며 육옹과 祝孟獻을 다시 조선에 보냈다. 뒤이어 國子監生들이 말값으로 지불할 文綺絹·緜布 9만여 필과 약재 등을 우마 300마리가 끄는 수레 150량에 가득 싣고 개경에 도착하였다. 의정부는 다음<표 3>과 같이 교역할 말값을 결정하였다.

大 馬  上 等 價
中 等 價
下 等 價
常 五 升 布 500필
常 五 升 布 450필
常 五 升 布 400필
中 馬  上 等 價
中 等 價
下 等 價
常 五 升 布 300필
常 五 升 布 250필
常 五 升 布 200필

<표 3>말의 시세

 그리고 명에서 보내온 段子의 교환비율을 다음<표 4>와 같이 정한 다음 여러 가지 약재를 아울러 지급하게 하였다.

段 子 上 品 1필
中 品 1필
下 品 1필
常 五 升 布 90필
常 五 升 布 80필
常 五 升 布 70필
官 絹    1필 常 五 升 布 30필
中 絹    1필 常 五 升 布 25필
緜 布    1필 常 五 升 布 20필

<표 4>단자의 교환비율

 교역된 마필은 1천 필씩을 단위로 하여 요동도사로 운송되었으며, 남경이 연왕군에게 함락되기 한 달 전까지 모두 약 7천 필이 운송되어 갔다.533)≪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8월 기묘·9월 정해·10월 무오. 이러한 대규모의 마필교역은 조선의 마필이 현저히 줄어들고 명도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세조연간 이후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명의 절실한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특수무역의 대표가 마필교역이라고 한다면, 서책교역은 조선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명무역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유교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명으로부터 문물제도를 도입하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각종 서적을 수입하여 간행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조선의 서책교역은 양국관계가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드는 태종연간부터 시작되고 있다. 명 성조는「정난의 역」의 결과 새로 탄생한 영락정권을 가장 신속하게 인정하여 주고 조공을 바친 조선에 대하여 갖가지 호의를 베풀었다. 약재교역을 위해 조선사신이 가지고 온 布匹을 그냥 팔아 가도록 하고 약재 18종 82근 8냥을 무상으로 하사한 일도 있었다. 조선사신 成石璘이 冕服을 하사하여 주기를 요청하며 “우리 전하께서 성품이 본래 배우기를 좋아하고 元子가 또한 나이 10세여서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항상 서책이 적은 것을 걱정합니다”라고 하자 명 성조는 흔쾌히 사신 黃儼을 조선에 보내 태종의 면복과 태상왕의 表裏, 중종의 冠服과 함께 원자가 읽을 여러 종류의 서책을 각 1부씩 보내 주었다.534)≪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8월 임신·10월 신미.
서책의 종류는≪元史≫·≪十八史略≫·≪山堂考索≫·≪諸臣奏議≫·≪大學衍義≫·
≪春秋會通≫·≪眞西山讀書記≫·≪朱子成書≫등이었다.

 이후 조선은 더욱 능동적으로 서책교역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태종 4년(1404)에는 유교윤리를 확립시키는 데 필요한≪古今烈女傳≫110부를, 세종 8년(1426)에는 경서인 四書五經 및≪性理大全≫1부 120책,≪通鑑綱目≫1부 14책을 구입하였다. 세종 17년에는 南智를 성절사로 파견할 때 胡三省의 音注≪資治通鑑≫, 趙完璧의≪源委≫, 金履祥의≪通鑑前編≫, 陳桱의≪歷代筆記≫, 元丞相 脫脫 撰集의≪宋史≫를 내려주도록 주청하였다. 또 이와 동시에 명 성조 때 찬집한≪四書大全≫·≪五經大全≫과≪綱目≫·≪書法≫·≪國語≫등 본국에 없는 사서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구입하여 오도록 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책교역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각종 의서나 지리서도 여러 가지 구입하였으며, 이렇게 구입된 서책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바로 간행되고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서책교역에는 주로 布匹이 교환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종 7년에≪集成小學≫100권을 사오게 할 때 그 간으로 濟用監의 苧麻布를 사신에게 지급하였다. 세종 22년 어느 요동사람이 호삼성의≪羸蟲錄≫과≪大明集禮≫를 팔려고 하는 것을 안 세종은 각각 마포 15필과 10필을 주어 사들이게 조치하였다. 때로는 白貼扇과 인삼 등으로 교역하는 수도 있었으나 16세기까지 여전히 쌀·면포가 중요한 교환수단이 되었다. 서책교역은 조선 중기에 들어서 연산군연간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중종 연간에는 다시 활발하게 회복되어 인쇄술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유교문화를 널리 보급시키는 등 민족문화의 창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535)李存熙,<朝鮮前期 對明書冊貿易>(≪震檀學報≫44,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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