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4) 중요한 현안문제
  • (1)「생흔」과「모만」의 문제

(1)「생흔」과「모만」의 문제

 태조의 즉위승인을 받는 일로 크게 긴장하였던 조선은 의외로 순조롭게 즉위승인은 물론 국호까지 개정할 수 있게 되자 일단 안도하였다. 그러나 태조 2년(1393) 5월 명 태조는 명사 黃永奇와 崔淵을 보내, 조선이 명을 업신여기며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고 엄중히 책망하는 手詔를 전달하였고 이로써 앞으로 대명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이 예고되었다. 이른바「生釁」 3개조와「侮慢」 2개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536)≪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5월 정묘.

① 兩浙의 불량한 자가 중국의 소식을 조선에 전한 까닭에 이미 수십 가를 살륙하였으니 이것이 生釁의 제1이다.

② 사람을 요동에 보내서 行禮를 가장하고 布帛과 금은으로써 요동의 邊將을 유인하니 이것이 생흔의 제2이다.

③ 최근에 비밀리 사람을 요동에 보내서 여진을 유인하여 그 가족 500여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이 생흔의 제3이다.

④ 입으로는 조공한다고 하면서 늘 작고 쓸 수 없는 말을 보내니 이것이 侮慢의 제1이다.

⑤ 국호를 개정하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이것이 모만의 제2이다.

 5개조의「생흔」과「모만」을 열거한 다음, 명 태조는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정벌함이 마땅하나 만약 유인한 여진인 전부를 송환한다면 정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조선은 中樞院學士 南在를 명에 파견하여 갖가지의 오해와 억측에 대해 해명하는 한편, 문제의 핵심인 조선으로 도망쳐 나온 여진인과 본국인도 현재 요동의 軍籍에 올라 있으므로 모두 잡아 송환하는 성의를 보이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조 2년 4월에는 명사 脫歎不花가 와서 옛날 그의 관할하에 있던 인민을 추쇄해 간 일이 있었다. 탈탄불화는 원래 동북면에 살던 여진인으로서 공양왕 원년(1389)에 명으로 귀화한 자였다. 귀화할 때 그의 관할하의 여진인들을 인솔하여 갔는데, 그 때 그의 관할하의 사람 중에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은 이번 기회에 이들도 모두 함께 압송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泥城·江界 등지에서 도망하여 나온 여진인 400여 명을 추쇄하여 李至로 하여금 압송케 하는 한편 요동으로부터 도망나온 조선인 朴龍 등 122호, 338명과 탈탄불화 관할하의 여진인 仇乙吐 등 25호, 116명을 曹彦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압송케 하였다.

 조선에 대한 명 태조의 의혹과 불만의 핵심은 조선이 요동의 邊將을 꾀어 여진인 500여 명을 유인해 갔다는 사실에 있음이 틀림없다. 요동도사가 명 태조에게 “근래에 조선이 변장을 보내어 여진인 500여 인을 초유해서 몰래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앞으로 요동을 침략하려고 한다”537)≪明太祖實錄≫권 334, 洪武 26년 6월 기축.고 보고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명 태조는 조선의 여진유인을 요동정벌의 가능성과 연결지어 크게 우려하였던 것이다. 명 태조는 조선에 황영기를 보내 책망하는 동시에 요동도사로 하여금 조선사절의 입국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貢期문제를 파생시켰다. 또한 명 태조는 左軍都督府에 명령을 내려 金州·復州·海州·盖州 등의 關隘를 증설하고 城隍을 수리하도록 하며 압록강까지 순찰을 내보내도록 하였다.538)≪明太祖實錄≫권 335, 洪武 26년 7월 신해.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당시에 중국의 연해 각 지방을 3차에 걸쳐 침입한 조선 해적사건은 조선에 대한 명 태조의 경계심을 더욱 증폭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첫째는 왜구로 가장하고 요동반도 金州衛 新市軍屯에 침입한 海州靑山千戶 哈都干의 무리이다. 둘째는 산동반도 寧海衛에 침입한 만호 金士彦의 무리이다. 셋째는 절강의 澉浦에 침임한 胡德의 무리이다. 이들이 명에서 자백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중국의 소식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의 왕이나 지방관이 파견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조선의 해명과 맞추어 보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이들 조선 해적의 출현이 명 태조로 하여금 조선을 더욱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명 태조가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심과 불만을「생흔」과「모만」이라는 말로 압축하여 표시하였다고 보면,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 해적사건은 바로「생흔」의 연장인 셈이며 뒤이어 발생하는 표전문제는「모만」의 확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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