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4) 중요한 현안문제
  • (2) 표전문제와 요동정벌계획

(2) 표전문제와 요동정벌계획

 表箋문제란 조선이 명에 보낸 표전 속에「譏侮」또는「戱侮」의 뜻이 있는 글자가 섞여있다고 하여, 명 태조가 조선사신을 억류시키는 동시에 표전을 지은 책임자를 압송해 오도록 요구한 사건이다. 표전문제가 양국간에 현안문제로 대두되기 이전부터 명 태조는 이미 여러 차례 조선의 표전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었다. 처음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결정해준 데 대한 조선의 사은표전 속에 ‘侵侮之辭’가 있다고 태조 2년(1393) 12월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태조 정안군 이방원이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도, 명 태조는 조선에서 보낸 표문의 문구가 매우 괴상하므로 앞으로는 조공을 하며 進賀할 때 표문을 올리지 말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내연하던 문제가 드디어 분규로 발전하여 3차에 걸친 표전문제가 일어났다.

 제1차 표전문제는 태조 4년 10월에 大學士 柳玽와 漢城府君 鄭臣儀가 하정사로서 가지고 간 하정표문이 문제가 되었다. 명은 표문 속에「輕薄戱侮」의 문구가 있다고 하여 유구 등을 억류시키고, 유구의 공술에 따라 撰文者인정도전을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조선은 조선의 聲音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고 학문이 천박하여 표전양식을 제대로 알지 못해 언사가 경박하게 된 것이지 고의로 戱侮의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하정표문은 鄭擢이 쓰고 賀東宮箋文은 金若恒이 썼는데 정탁은 마침 풍질을 앓아 움직일 수 없으니 김약항만 보낸다고 하며 정도전의 管送요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무시하여 버렸다.

 제2차 표전문제는 같은 해 11월에 藝文春秋館 대학사 鄭摠을 보내 국왕의 고명과 인신을 요청한 奏請文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명은 주청문 속에「引用紂事」한 일, 즉 殷紂의 일을 인용한 점이 특히 무례하다고 하며 정총을 억류시키고 찬문자 및 교정자의 압송을 요구해 왔다. 이렇게 표전문제가 잇따라 발생하며 명이 정도전의 관송을 다시 재촉하여 오자, 조선은 하륜을 계품사로 삼아 표전작성에 관여한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과 우승지 정탁 및 교정자인 敬興府 舍人 盧仁度를 명에 보내며 여전히 개국원훈인 정도전은 제외시켰다. 결국 명에 보낸 사람 중에 정총·김약항·노인도의 3인만 오랫동안 귀국하지 못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바로 귀환하였다.

 제3차 표전문제는 조선이 태조 6년 8월 前光州牧使 柳灝을 천추사로 명에 파견하였는데, 그 千秋啓本이 또 문제가 되어 찬문자를 보내올 때까지 사신을 억류하겠다고 통고하여 온 것이다. 조선은 통사 郭海龍으로 하여금 찬문자인 禮曹典書 曹庶를 관송하여 보냈다. 명은 곽해룡과 조서를 구류시키는 한편, 조서의 공술에 의해 啓本작성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진 성균관사성 孔俯, 전 예조정랑 尹珪, 현 예조정랑 尹順 등 3인을 추가로 관송해오도록 요구하였다. 조선은 결국 소수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3인을 보냈는데 이들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마침 명 태조가 승하하고 황태손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바로 대사면을 얻어 도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명 태조의 사망에 따라 3차에 걸친 표전문제는 완전히 결말이 지어지고, 명이 조선의 표전에 대해「譏侮」또는「戱侮」를 이유로 불만을 제기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다.

 표전문제는 명초에 중국내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던 필화사건 즉「文字獄」의 일환이었다. 명초의 문자옥은 다른 시대의 문자옥과는 달리 대부분 명 태조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원말에 濠州 鍾離縣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매우 궁핍하게 자라났다. 원말의 동란기를 맞아 청소년기를 탁발승으로 유리걸식하는 생활로 보냈으며, 그 후 홍건적의 일파인 郭子興에게 투신함으로써 입신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주원장은 성장기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였고 皇覺寺에서 중노릇을 할 때 또는 홍건적의 대오 속에서도 배우고자 발분하였으나 기초가 부족하여 학식의 천박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출신과 학문에 대한 주원장의 열등의식은 대명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도 뿌리깊게 남아 있어, 이른바 명초「문자옥」의 원인이 되었다.

 명 태조는 지난날 자신의 궁핍했던 和尙노릇과 홍건적 출신임을 누군가가 반드시 몰래 조롱하고 있을 것이라는 악몽에 늘 시달렸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암시할 수도 있는 문자를 표전에 사용한 문인을 무수히 처형하였다. 문자상의 금기는 상당히 광범하여 중의 두발 없는 머리를 상징할 수 있는「光」·「禿」은 물론,「僧」및「僧」과 발음이 비슷한「生」도 포함되었다. 홍건적을 암시할 수 있는「賊」은 물론이고 이와 비슷한 발음인「則」도 기피되어야 했다. 단순히 뜻만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글자를 연상하여 제멋대로 억측하고 풀이한 다음, 작성자를 가려내어 이유도 설명하여 주지 않고 처형시켜 버렸던 것이다.539)趙翼,≪二十二史剳記≫권 32, 明祖行事多仿漢高.

 표전문제가 명초 문자옥의 일환이라는 점은 3차 표전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명과 조선간에 왕래한 문서를 분석하여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명의 禮部尙書 鄭沂가 글자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어구를 이루어 譏侮했다고 문책한데 대하여, 조선은 “또한 조정의 文字양식과 회피해야 할 글자를 몰라 이런

 착오를 일으켰으며 … 앞으로의 문서가 또 잘못될까 두려우니 마땅히 회피해야 할 글자들을 小邦에 내려주어 오래 준수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540)≪太祖實錄≫권 12, 태조 6년 12월 병오.라고 회답하였다. 우선 표전 문장의 발음까지 문제삼는 명 태조의 비정상적인 해독법이 드러나 있고, 표전문제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까닭을 전혀 짐작도 못하던 조선도 명 태조에게 사용해서는 안될「회피하여야 할 글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다.541)朴元熇,<明初 文字獄과 朝鮮表箋問題>(≪史學硏究≫25, 1975).

 표전문제로 말미암아 양국관계는 크게 악화되어 갔다. 표전문제가 아무리 명 태조 개인의 열등의식에 의해 발생한 문자옥의 일환이라고 하더라도, 명 태조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명에 대한 조선의 계속적인「모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표전문제가 한창 야기되고 있던 태조 2년(1393)으로부터 7년까지의 약 5년간 요동정벌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조선의 움직임은 명 태조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조선의「生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표전문제가 발생하자 명 태조는 이를 기화로 조선을 더욱 위압함으로써 조선이 감히 요동으로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명 태조는 조선이 요동정벌을 감행할지도 모르며 그 계획의 중심인물이 정도전이라는 사실을 태조 2년경부터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태조 원년에 정도전이 사은사로 명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山海衛를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조선과 명 사이의 관계가 잘 풀리면 좋지만 잘 풀리지 않으면 군대를 끌고 와서 한바탕 약탈할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보고받은 후부터 정도전을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정도전이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태조 2년에 三軍總制府를 義興三軍府로 개혁하고 重房을 혁파하는 군제개편이 단행되었다. 또 정도전은 門下侍郎贊成事로부터 判三司事에 임명되고 곧 이어 판의흥삼군부사를 겸임함으로써 군부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정개혁과 군비강화에 힘쓴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명 태조는 1차 표전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약 3년 전부터 정도전을 지목하고 있다가, 마침 하정표문이 문제화되고 하정사 유구의 공술을 통해 정도전도 표문작성에 관여한 인물로 밝혀지자 정도전의 관송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실제로 하정표문은 정탁이 짓고 권근이 수정하였으며 정도전은 형식적인 책임자로서 교정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 태조는 계품사 하륜에게 정도전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힐문하는 등 정도전에게만 유별난 집착을 보이며 정탁과 권근은 쉽게 귀국시켜 주었다.

 조선조정에서도 조준·하륜·李芳果 등은 태조에게 정도전을 명에 보내도록 진언하였다. 통사 楊添植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몰라도 조선에 와 있던 명사 楊木兒·牛牛에게 정도전을 꼭 데리고 가도록 적극적인 공작까지 벌임으로써 조정 내부의 암투를 노출시켰다. 고심하던 태조가 끝내 병을 이유로 정도전을 명에 보내지 않고 버티자 명 태조는 더 이상 관송요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사신을 접견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도전을 혐오하며 그를 감싸는 태조의 어리석음을 힐난하였다.

지금 조선국왕 이성계가 중용하고 있는 정도전이라는 자는 왕에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말인가. 왕이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이 반드시 조선의 화근이 될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이란 자를 잘 모른다. 그를 중용하여 무엇한다는 말인가. 네가 돌아가거든 왕에게 분규를 일으키지 말도록 일러라. 소인의 말을 듣고 함부로 도발하다가는 앞으로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다(≪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기해 ).

 동시에 명은 조선이 요동을 정벌할 것이라는 풍설에 계속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간첩을 보내 정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표전문제가 야기되던 기간에 명 태조는 조선을 정벌하겠노라고 기회있을 때마다 위협을 가하였으나, 실제로 조선을 정벌하려는 의도나 준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조선이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으로 위협을 가하였을 따름이었다. 명 태조는 태조 4년(1395) 11월 遼王의 궁실공사를 중지시키며 武定侯 郭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國都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의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역마다 1, 2만 석 또는 7, 8만 석, 10여만 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東寧府의 여진을 유인하여 넘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을 것이다 … 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는 바, 즉시 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유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못된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을 내어 쳐들어 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明太祖實錄≫권 238, 洪武 28년 4월 신미).

 조선정벌은 커녕 오히려 방어태세를 갖추는 데 급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조 2년경부터 군정개혁·陣圖제작·군사훈련·훈련점검·병기제조 등 군비강화를 추진해오던 정도전은 태조 6년 6월경에 요동정벌계획을 표면화시키고 태조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의 정치적 적대세력이었던 태종과 하륜 등에 의해 후일 일부가 왜곡된≪太祖實錄≫에서는, 몇 군데에서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된 동기가 당시 표전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명에 관송되어가지 않기 위함이라고 앞뒤를 바꾸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은 정도전에 대한 명의 관송요구가 끊어진 지 이미 만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542)朴元熇,<明初朝鮮의 遼東攻伐計劃과 表箋問題>(≪白山學報≫19, 1975).

 요동정벌계획은 조준 등이 군량부족·군사훈련결핍·민심불안을 내세워 완강하게 반대하여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 그러나 잠시 보류되었던 요동정벌계획은 1년이 지난 태조 7년 윤 5월경부터 다시 대두하여 태조의 영도하에 확고한 국가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그해 8월에 대사헌 成石瑢이 陣圖를 강습하지 않는 절제사 이하 大小員將 292인을 대량으로 탄핵함에 따라 태조가 이들을 책벌한 일이 있었다. 진도의 강습을 그렇게 서두르게 된 까닭에 대해≪태조실록≫에서는 “처음에 정도전과 南誾이 왕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543)≪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8월 임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도강습을 비롯하여 이 무렵에 맹렬하게 전개된 군사훈련이 요동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보류되었던 요동정벌계획이 1년 후에 다시 부활하게 된 이유는 정도전 일파의 지속적인 설득과 공작의 탓도 있겠지만, 당시 표전문제로 인한 양국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명의 가중되는 위압이 오히려 조선을 더욱 반발하게 만들어 준 데도 있었다.544)朴元熇,<朝鮮初期의 遼東攻伐論爭>(≪韓國史硏究≫14, 1976).

 요동정벌계획은 태조 7년 8월에 일어난「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남은 등이 살해당하고, 요동정벌계획을 추진하였던 태조가 선위하고 정종이 즉위함으로써 완전히 좌절되었다. 한편 조선에 대한 불신감과 경계심으로 끊임없이 고압정책을 펴던 명 태조가 같은 해 윤5월에 사망하고 황태손인 명 혜제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양국에서 서로를 혐오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던 세력이 극적으로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이는 명과 조선의 양국에 모두 한 시대의 마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국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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