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4) 중요한 현안문제
  • (4) 여진귀속문제

(4) 여진귀속문제

 「정난의 역」의 결과 제위에 오른 명 성조가 安南정벌·西洋出使·몽고친정·여진초무 등 대외팽창적인 정책을 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특히 적극적인 여진초무정책을 통한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은 필연적으로 조선과의 사이에 긴장관계를 유발시켰다. 명과 조선 사이에 끼어 문제가 되었던 여진부족은 吾都里·兀良哈[오랑캐]·兀狄哈[우디캐] 등으로서, 그 가운데 오도리는 후일 淸朝황실의 조상이 되는 부족으로서 가장 주목을 끈다. 명의 여진초무와 그에 따른 여진의 동향은 사실 명과 몽고와의 관계와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다. 명 성조 스스로가「五征漠北」을 단행한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명의 가장 중요한 대외문제는 몽고정복이었다. 몽고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명 성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심혈을 기울였으며, 몽고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명의 여진초무가 더욱 긴요해졌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태종 3년(1403) 11월 오랑캐의 於虛出이 來朝하자 명 성조는 建州衛를 설치하기로 하고 어허출을 지휘사에 임명하였으며, 13월에 忽刺溫의 西陽哈이 내조하였을 때 兀者衛를 설치하였다. 최초의 여진위소가 되는 이 두 위는 앞으로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여진을 초무하는 명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여진 각 부가 속속 귀부해옴에 따라 위소를 차례로 설치해 나가게 되는 바, 태종 4년으로부터 奴兒干都司가 설립되는 태종 9년까지 모두115개의 위소를 설립하였다.547)孫進己,≪女眞史≫(吉林文史出版社, 1987), 170쪽.

 명의 여진을 초무하는 손길이 두만강유역까지 뻗쳐오자 조선조정은 아연 긴장하였다.

三府가 모여 여진의 일을 논의하였다. 황제가 여진 吾都里·兀良哈·兀狄哈 등을 초무하며 조공을 하도록 칙유하였는데, 여진 등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가 모여 의논한 것이다. 그 칙유가 여진문자를 사용하여 알 수가 없었으므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 뜻을 풀어 번역하게 한 다음 의논하였다(≪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신미).

 두만강유역에 거주하고 있는 오도리·오랑캐·우디캐 등의 여진이 원래 조선에 속하여 있다는 인식이 있는 조선은 명의 여진초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도리의 퉁멍거티무르 등이 조선으로 내조하여 오자, 태종은 그에게 上護軍의 관직을 내려주고 크게 환대하여 돌려 보냈다. 여진을 초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동천호 王可仁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먼저 사람을 보내 오랑캐의 把兒遜(波乙所) 등에게 衣布를 하사하는 한편, 명의 사신이 이르렀을 때 응대할 대책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명사 왕가인이 여진 땅을 향하여 떠난 다음, 태종은 하륜과 권근에게 고려 때 尹瓘이 동여진을 치고 비를 세운 사실을 史庫의≪睿宗實錄≫에서 조사하도록 지시하는 등 명의 여진초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부심하였다.

 동북면에서 초무에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온 왕가인이 명으로 귀환할 때, 태종은 김첨을 계품사로 남경에 파견하여 公嶮鎭 이남의 땅이 원래 조선영토로서 그 곳에 살고 있는 여진을 조선이 계속 관할할 수 있게 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는 명사 왕가인이 지니고 온 칙유 속에서 명이 오도리 등뿐만 아니라 공험진 이남 철령 이북에 살고 있는 10처의 여진인민까지 초유하려는 방침에 대응한 것이었다. 조선이 10처의 여진인민이 조선땅에 들어와 산 지가 오래고 또 조선인과 혼인하기도 하며 부역을 치르고 있다는 주장을 상세한 역사적 내력을 들어가며 설명하자, 명 성조는 조선의 관할권을 인정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두만강유역의 여진에 대한 명의 초무는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당시 鳳州 부근에 있던 오랑캐의 어허출은 명 성조가 연왕으로 있을 때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바친 일도 있는 바, 건주위가 설치되자 都指揮使로서 명의 요동경략에 협력함과 동시에 여진 내부에서 자기의 세력확대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吾音會(會寧)에 있던 오도리의 퉁멍거티무르는 그렇지 않았다. 두만강유역의 여진을 초무하는 데 한계에 부딪친 명 성조는 드디어 명사 王敎化的을 보내어 태종의 협력을 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왕교화적이 도착하기 전부터 태종은 좌정승 하륜과 우정승 조영무에게 동북면의 울타리인 퉁멍거티무르를 지킬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여 명에 양보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는 왕교화적이 동북면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몰래 申商을 퉁멍거티무르에게 보내어 명사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당부하였다. 조선은 명의 여진초무가 본격화될수록 동북면 일대에 커다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동안 우디캐 등의 침입을 막아 주던 오도리를 계속 조선의 세력권 아래에 붙들어 두고자 하였다.

 명의 집요한 초무에 직면한 오도리의 퉁멍거티무르는 왕교화적에게 조선을 섬긴 지 20여 년이나 되고 조선이 명과 친교하기를 형제와 같이 하므로 따로 명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把兒遜·着和·阿蘭 등 세 만호도 퉁멍거티무르와 함께 본래의 뜻을 변치 말고 조선을 우러러 섬기자고 언약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미 퉁멍거티무르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어느 의미에서는 조선이 명에 대해 취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동안 嫌眞우디캐와 骨看우디캐의 초유를 위해 또 왕가인을 파견하고, 毛憐의 오랑캐 만호 파아손·저화·答失 등을 초무하기 위해 다시 백호 金聲을 동북면으로 파견하는 등 명의 노력은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왕교화적과 그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파견된 徐元奇가 약 4개월 동안 머물며 끈질기게 회유한 결과, 가장 완강하게 버티던 퉁멍거티무르는 드디어 고집을 꺾고 명 성조의 칙서를 맞이하며 채단을 받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조선은 李行을 남경에 보내어 이들 여진이 최근에 허락받은 10처 인민의 범위 내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예전대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대호군 李愉를 오음회에 보내 명의 초유에 응하지 말도록 다시 한번 종용하였다.

 여진초무를 둘러싸고 명과 조선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태종 5년(1405) 3월부터 6월까지 조선은 실로 소나기처럼 여진 각 부에 하사품 공세를 폈다. 동북면에 갔던 이유가 8월에 돌아오면서 비로소 퉁멍거티무르가 명에 입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선조정은 충격을 받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토의하였으나 마침내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퉁멍거티무르는 왕교화적을 따라 명에 입조하며 만일 입조하지 않으면 어허출이 자신의 백성까지 차지할 것이므로 부득이 입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명하였다. 오랑캐의 어허출과 경쟁관계에 있는 그로서는 능히 우려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의 계품사일행이 남경에 이르자 명 성조는 퉁멍거티무르를 보내지 않은 일로 이들을 준열히 꾸짖었다. 퉁멍거티무르는 명에 입조하지 않을 뜻을 조선에 내비치면서도 명 성조에게는 곧 입조하겠다는 뜻을 알렸던 것이다.

 퉁멍거티무르가 명에 입조하기로 한 결정은 당장 적지 않은 파급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오랑캐 만호 파아손 등 20여 명이 퉁멍거티무르의 입조 때와 비슷한 논리로 입조를 천명하고 나섬으로써 두만강유역 여진의 향배가 거의 결정되었다. 명은 주문사 李玄에게 조선이 퉁멍거티무루의 입조를 방해한 데 대해 질책하고, 마침 남경에 와 있던 일본사신보다 이현의 서열을 낮추어 버림으로써 조선에 대한 불신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조선은 그동안 여진이 소금·철·소·말을 교역해 오던 慶源교역을 중단함으로써 명의 초무에 응한 여진에 대해 불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었고, 이에 분격한 우디캐의 金文乃 등이 건주위의 부추김 속에 경원으로 쳐들어왔다가 朴齡에게 격파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퉁멍거티무르 등이 명에 입조하자 명 성조는 그에게 건주위도지휘사를 제수하고 어허출의 아들 金時家奴를 건주위지휘사로, 阿古車를 毛憐等處指揮僉使로 삼았다. 이에 따라 두만강유역의 여진초무를 둘러싼 명과 조선간의 경쟁은 대세가 완전히 기울게 되었다. 이 때부터 명은 조선에 漫散軍民의 송환을 재개할 것과 명의 초무에 응한 여진의 가속을 보내도록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영락정권이 수립되자마자 조선은 명의 요구에 따라 만산군민을 몇 차례 송환시켜 성의를 표시한 바 있었지만, 계속되는 명의 독촉에 따라 추가 송환을 재개하고 여진가속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548)朴元熇,<永樂年間 明과 朝鮮間의 女眞問題>(≪亞細亞硏究≫85, 1991).

 조선왕조 수립 이래 명과의 현안문제는 명 태조가 조선을「生釁」과「侮慢」을 이유로 질책한 데서 비롯되었다.「생흔」과「모만」의 핵심은 조선이 여진을 유인하고 있으며 요동정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진귀속문제는 요동정벌과 같은 정면 충돌은 아니고 여진초무를 둘러싼 암투였지만, 결국 명의 힘에 굴복하여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고려말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대명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중요한 현안문제의 바탕에는 표면적인 현상과는 별도로 요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양국의 치열한 각축이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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