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5) 명과의 나머지 문제
  • (1) 금은세공의 면제

(1) 금은세공의 면제

 「정난의 역」이 진행되던 기간에 명에 보내는 조공사절을 1년 3사로 슬그머니 확정시켰던 조선은 공물 가운데 금은의 수량을 맞추기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태종 9년(1409) 聖節使로 偰眉壽를 보내며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금은은 원래 본국에서 나지 아니하고, 전에 원의 객상이 왕래하며 가져 온 약간의 금은이 있었으나 수십 년 사이에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절기를 맞을 때 본토에서 나지 아니하는 金銀器皿을 준비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토산의 다른 물자로 진헌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정월 갑자).

 그러나 명의 예부상서가 화를 내며 황제에게 직접 아뢰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명 성조에게 보고조차 되지 못하였다.

 태종은 각지에 採訪使를 파견하여 금은채굴을 독려하거나, 명에 파견되는 통사를 시켜 採銀法을 알아 오게 하는 등 증산을 위해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는 해에 상왕이 된 태종은 다시 금은 대신에 마필·布子로 대체시킬 수 있도록 사신을 파견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세종 2년(1420) 예조참판 河演과 光祿寺少卿 韓確을 보내 厚紙 35,000장과 石燃盞 10벌을 바치며 금은 대신 다른 품목으로 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선종이를 진상하는 상주문에 날짜를 적지 아니한 일로 황제가 진노하였으므로 역시 두번째의 ‘請免金銀奏本’도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조선은 금은채굴에 힘쓰는 동시에 혁파한 佛寺로부터 銀佛器 1,231냥과 金小塔 1개 9냥 등을 공조로 하여금 거두어 들이게 하였다. 또한 文科殿試의 策題로 ‘擬本國請免金銀方物表’를 내걸었으니 이 문제로 조선조정이 얼마나 고심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명에 파견되는 사신들로 하여금 금은의 매매여부와 가격 동향을 조사하게 한 것을 보면, 명으로부터 금을 사들일 생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금이 산출된다는 보고를 듣고 일본으로부터 금을 사들이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의 채굴기술로 貢額을 충족시키기가 지극히 어려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세번째로 금은세공의 면제를 명에 요청하기 위해 좌의정 黃喜, 우의정 孟思誠 등에게 표문제작·사신선택·代物선정을 신중하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1년에 恭寧君 裀과 右軍都摠制 元閔生을 명에 보냈다. 이에 明宣宗은 다음과 같이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조선은 먼 나라인데 조공사신은 여러 차례 온다. 공물은 금은을 보내오니 어찌 작은 나라가 늘상 갖출 수 있겠는가. 국왕에게 칙유하노니 앞으로 貢獻함에 토물로써 성의를 보이면 족하다(≪明宣宗實錄≫권 59, 宣德 4년 10월 신묘).

 이로부터 조선은 마필과 포자로써 매년 황금 150냥과 백은 700냥의 공물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태종 9년에 처음 금은세공의 면제를 명에 요청한 이래 20년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금은세공의 면제는 금은의 산출이 많지 않은 조선에게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금은세공을 통해 금은채굴을 위한 탐사방법과 기술개발이 촉진되었던 것이 중단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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