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5) 명과의 나머지 문제
  • (2) 엄인·처녀의 진헌

(2) 엄인·처녀의 진헌

 火者 등으로도 불리는 閹人과 처녀를 진헌하는 일은 고려시대에 원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 명으로 이어졌다. 명 태조는 고려출신의 환관을 고려와의 교섭에 임할 사신으로 곧잘 내보냈고, 또한 새로운 고려출신 엄인을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관례가 명과 조선 사이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명의 요구에 따라 조선이 보낸 엄인은 다음의<표 6>과 같다.

연 대 인 원
태조 3년(1394) 5명
태종 3년(1403) 35명
태종 4년(1404) 10명
태종 5년(1405) 8명
태종 7년(1407) 29명
태종 17년(1417) 10여 명

<표 6>

 숫적으로는 별로 많은 수가 아니었으나, 조선에 미치는 정치적·사회적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고려·조선 출신의 환관이 주로 명사로 나와 조선과교섭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부린 횡포는 막심하였다.

 명사로 나온 환관들이 자신의 친척들에게 관직을 주도록 압력을 넣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태종 3년에 고명과 인신을 가지고 온 명사일행 중에 환관 朱允端이 자신의 친척 60여 명에게 관직을 내려주게 한 일이 있다. 또한 명사로 온 환관들이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보통 있는 일이었다. 고려말의 비슷한 예도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태조 2년(1393) 명사 金淵의 요구로 그의 고향 稷山縣을 郡으로 승격시킨 것이 처음이다. 같은 해 명사 金仁甫의 요구로 密陽郡을 府로 승격시켰으며, 陳漢龍의 요구로 林州郡을 부로 승격시켰다. 태종 3년에는 韓帖木兒과 朱允端의 요구로 金堤縣을 군으로, 임주군을 부로 각각 승격시켰다. 이러한 관례는 조선의 지방행정제도를 문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세종 7년(1425)에도 尹鳳의 요구로 瑞興郡을 都護府로, 예종 원년(1469)에는 鄭同의 요구로 信川縣을 군으로 승격시키는 등 계속 이어졌다.

 처녀를 진헌하는 일도 고려시대에 원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명으로 이어졌다. 우선 명 태조에게는 16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含山公主의 어머니는 高麗妃 韓氏였다. 함산공주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태어난 점을 헤아려 보면, 고려비 한씨는 적어도 그 이전에 진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명 태조 후비 가운데 碩妃가 고려출신인데 후예 명 성조가 되는 연왕의 생모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를 답습하여 명의 요구에 따라 처녀를 진헌하였는데 태종 8년 명사 黃儼이 와서 미녀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이 처음이다. 태종은 즉각 전국의 혼인을 금지시키며 進獻色을 두어 처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議政府贊成事 南在·知議政府事 咸傳霖·漢城府尹 孟思誠을 제조로 삼고 敬差官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 공사천예·서인·노비가 없는 양반을 제외한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여자를 고르도록 하였다. 태종과 명사는 3개월에 걸쳐 선발된 처녀 200명, 300명씩을 경복궁에서 몇 차례 간추려 마침내 5명을 뽑았다. 故典書 權執中의 딸을 비롯하여 前典書 任添年, 前知永州書 李文命, 司直 呂貴眞, 水原記官 崔得霏의 딸 등이었다. 임첨년에게는 仁寧府左司尹, 여귀진에게는 忠佐司領護軍, 이문명에게는 恭安府判官, 권집중의 아들에게는 中軍司正의 관직이 주어졌다. 명사는 병이 있는 임첨년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을 押物로 삼아 5명의 처녀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5명의 처녀는 명 성조로부터 권씨는 賢妃, 임씨는 順妃, 이씨는 昭義, 여씨는 婕好, 최씨는 美人으로 책립되었다. 또한 권씨의 오빠인 權永均은 명의 光祿寺卿, 임첨년은 鴻臚卿, 이문명과 여귀진은 光祿小臚, 최득비는 鴻臚小卿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인 태종 9년에 명사 황엄 등이 다시 와서 한두 명의 처녀를 진헌하도록 요구하였다. 태종은 다시 진헌색을 두고, 처녀의 혼인을 금지시켰다. 13세 이상 17세 이하의 처녀를 각 도에서 고른 끝에 前知宜州事 鄭允厚 및 副司直 宋瓊의 딸을 선발하여 보냈다. 이후에도 처녀의 진헌요구가 있어 태종 10년에 전 지의주사 정윤후의 다른 딸을 보냈고, 태종 11년에는 故知淳昌郡事 韓永矴, 태종 17년에는 故副令 黃河信의 딸을 선발하여 보냈다.

 세종 6년(1424) 명은 이제 皇妃로 삼을 처녀만이 아니고 侍婢로 삼을 여아를 요구해왔다. 귀국하는 奏聞使 元閔生이 2명의 처녀를 비롯하여 造酒·造膳·瀚衣를 잘하는 시비의 진헌을 요구하는 사명을 받아 가지고 온 것이다.

 이후에도 비슷한 요구에 따라 진헌이 다음과 같이 잇따랐다.

세종 8년(1426);처녀 5명, 炊飯婦 6명

세종 9년(1427);처녀 7명, 執饌婢子 10명, 從婢 16명

세종 11년(1429);歌舞女 8명, 執饌婢子 11명

세종 15년(1433);執饌女 20명

 그러나 처녀의 진헌은 세종 9년이 마지막이었고, 세종 17년에는 그 동안 명에 보냈던 시비와 집찬녀 등의 대부분인 53명이 송환되어 옴으로써 진헌이 일단락지어졌다.

 엄인·처녀의 진헌은 원이 고려에 요구하여 시작된 이래로 명에 답습되고 조선 초기까지 약 100년간 이어겼다. 명에 보낸 엄인과 처녀의 숫자는 그리 대단한 수는 아니었으나 조선사회에 미친 정치적·사회적 영향은 지대하였다.

 조선출신의 환관이 명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나와서 끼친 해독은 재언할 필요도 없지만, 처녀의 진헌도 조선사회에 조혼의 풍습을 형성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549)末松保和, 앞의 글, 462∼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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