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5) 명과의 나머지 문제
  • (3) 종계변무문제

(3) 종계변무문제

 이른바 宗系辨誣문제는 태조 3년(1394) 명사 黃永奇가 와서 조선해적사건을 힐책할 무렵에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명사 황영기는 左軍都督府 咨文과 함께 海岳山川의 신령에게 告祭하는 축문을 가지고 왔는데, 그 축문 속에서 태조 이성계를 李仁任의 아들로 간주하였다.550)≪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6월 갑신.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이인임을 그의 아버지로 간주하였으니 조선왕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다. 조선은 황영기가 돌아가는 편에 이성계가 고려 우왕 때의 권신인 이인임과 성은 같지만 같은 혈통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9년이 지난 태종 2년(1402)에 성절사 趙溫이 귀국하여 祖訓 條章 내에 조선국왕의 宗系가 李仁任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놀라운 보고를 받았으나 조선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즉각 파견하지 않았다. 당시는 바로「정난의 역」으로 말미암아 요동도 전란에 휩싸여 있어 사행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정난의 역」이 연왕의 승리로 끝나고 새로이 즉위한 명 성조로부터 새로운 고명과 인신 및 면복까지 받고난 다음, 조선은 해명을 위한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판단한 듯 태종 3년 사은사 李彬과 閔無恤 편에 종계를 바로잡기 위한 주본을 보냈다. 다음해 이면이 돌아와 조선국왕의 말에 따라 개정하라는 명 성조의 지시를 전해 왔으므로, 조선은 종계변무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하례까지 거행하였다.

 그러나 명태조가 제정한 皇明祖訓 자체는 절대로 개정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문제의 그 구절은 이후≪大明會典≫에 다음과 같이 전재되어 명이 멸망할 때까지 명분상으로 조선을 괴롭히는 두통거리가 되었다.

조선국은 즉 고려로서 그 李仁人(任) 및 아들인 이성계 지금 이름 旦이라는 자는 홍무 6년으로부터 홍무 28년까지 전후로 왕씨의 네 왕을 시해하였다(≪大明會典≫권 105, 禮部 63, 朝貢 1, 朝鮮國).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왕씨 네 왕을 차례로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계변무문제는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잡는 것과 동시에, 이성계가 고려말의 네 왕을 죽였다는 악명을 벗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명회전≫이 중종 13년(1518) 조선에 전래되자 조선은 南袞을 宗系辨誣奏請使로 보내기 시작하여 실로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다. 선조 20년(1587)에 이르러≪대명회전≫을 중수할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의 해명사실을 부기시키는 데 겨우 성공하였다. 사은사 兪泓이 萬曆重修本의≪대명회전≫을 가지고 선조 21년에 귀국함으로써, 180여 년에 걸친 현안문제가 해결되었다.

<朴元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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