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1) 대여진정책
  • (2) 여진정벌

(2) 여진정벌

 태종 2년 조사의란 이후에 조선은 여진을 근본적으로 불신하였다. 여진은 조선과 명의 양쪽에 입조하여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지 아니할 때에는 조선과 명의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여진이 자주 침입하여 약탈하던 지역을 보면, 조선에서는 함길도의 두만강연안과 평안도의 압록강 연안이었고, 명에서는 요동지방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두만강·압록강 양강 연안에 行城을 쌓고 煙臺를 구축하고, 강물이 얕은 지역에는 木柵과 鹿角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여진의 침입이 대개 겨울철에 많았던 것은 두 강이 얼었을 때에 강을 건너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진은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者皮船을 타고 가볍게 강을 건너 수시로 침입하였다. 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는 일은 조선 전기에 국방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리하여 변방의 고을을 翼軍체제로 조직하여 여진이 침입하면, 각 고을의 병력을 中軍과 左·右軍으로 체제를 짜서 신속하게 서로 구원하고 적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명이 만리장성을 연장하여 요동지방 주위에 “¬”자 모양의 遼東邊墻을 구축한 것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요동변장은 遼東都司의 관할하에 있던 요동의 25衛 2所를 보호하기 위한 장성이었다.563)李健才,≪明代東北≫(遼寧人民出版社, 1986). 변장 바깥 建州女眞·海西女眞·野人女眞의 만주 내지에는 奴兒干[누르칸] 都司의 관할하에 女眞 184衛를 설치하였지만,564)楊暘·袁閭琨·傳郎云,≪明代奴兒干都司及其衛所硏究≫(中國人民大學 淸史硏究所, 1982). 명은 기미정책을 추진하여 여진의 추장이 명에 입조하면 打圍放牧을 허락하고 그들의 관하 민호에 대한 통제를 자유에 맡겼다. 따라서 사실상 만주의 여러 여진족들은 명의 통치권 밖에 있었다. 명은 요동지방 25위 2소에 軍政을 실시하고 그 거주민을 모두 軍戶로 편입하여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조선과 명은 때때로 힘을 합하여 여진을 협공하였다. 세조 13년(1467) 9월에 조선과 명의 군사가 함께 건주위를 공격하여 李滿住 부자를 죽인「成化 3년의 役」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명은 여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 건주좌위 출신 누르하치에게 멸망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여진이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한 대상은 주로 牛馬와 사람이었다. 우마는 여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고, 사람은 농경생활을 시작한 여진사회에서 농경노예로서 매우 고가에 轉賣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진의 사람약탈은 조선과 명을 자극하여 대규모의 여진정벌을 가져왔다. 조선에서는 여진의 침입을 많이 받았으나, 피해가 클 때에만 군사를 보내어 정벌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정벌군은 대개 함길도와 평안도의 현지 軍丁을 징발하여 투입하는 것이 상례였다. 명에서도 요동의 군정을 징발하여 원정군을 구성하였다.

 태종대 조사의란 이후 선조대까지 여진족이 침입한 횟수를 보면, 도합 130여 회나 되는데, 태종대에 8회, 세종대 30회, 세조대 19회, 성종대 22회, 연산군대 17회, 중종대 11회, 명종대 6회, 선조대 18회 등이었다.565)劉鳳榮,<朝鮮實錄에 나타난 李朝前期의 野人>(≪白山學報≫14, 1973), 95쪽.

 조선은 여진족이 침입할 때마다 적절하게 대처하였다. 침입의 피해가 클 때에는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한 여진족을 즉각 응징하였다. 조선의 원정군은 두만강·압록강을 건너가서 그 본거지를 초토화하고 바로 군사를 돌이켰는데, 그 특징은 되도록 짧은 시간에 제한된 지역에서 행하여졌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에 단행된 대규모의 여진정벌은 모두 13차례나 있었다.

 당시의 여진족의 종족 갈래를 보면, 양강 근경에 살던 오도리족·오랑캐족과 만주 내지에 살던 우디캐족으로 구분된다. 오도리족의 건주좌위는 조선에비교적 우호적이었으나, 오랑캐족의 건주본위는 조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에 침입한 근경의 여진은 대부분 오랑캐족이었다. 특히 세종대 이후 세조대까지의 여진족의 침입은 당시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하던 건주본위의 이만주가 직접·간접으로 간여한 것이었다. 세종 15년(1433)과 세종 19년의 압록강 중류 婆猪江(오늘날의 佟佳江) 야인정벌은 바로 이만주 세력의 본거지를 토벌한 것이었다. 명도 이만주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조선에 원정군을 요청하여, 세조 13년(1467)에 건주여진의 본거지를 소탕하고, 이만주 부자를 살해하였다.

 한편 두만강의 중류 毛憐(毛里安;間島 海蘭河 일대)에는 건주본위 오랑캐족의 별종이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자리잡았던 건주좌위 오도리족 세력과 항상 대립하였다. 오도리족의 대추장 퉁멍거티무르가 죽은 뒤 오도리족의 세력은 분산되었다. 아우 童凡察(건주우위 開祖), 손자 童倉(건주좌위 계승)566)童凡察은 童猛哥帖木兒의 異父同母弟였다. 童猛哥帖木兒의 어머니 也吾巨는 처음에 揮厚와 결혼하여 童猛哥帖木兒를 낳고, 그 남편이 죽은 다음에 그 동생 包哥와 결혼하여 童於虛里·童凡察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 管下民戶도 서로 나누어 거느렸기 때문에 결국 建州左衛와 右衛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등의 주류세력은 오랑캐족의 본거지로 합류하였으나, 또 다른 아우 童於虛里 등 다수 세력은 그대로 남아서 6진의 藩胡로서 조선에 충실히 복속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모련의 오랑캐를 쳐서 건주위의 세력을 견제하였는데, 태종 10년(1410)과 세조 6년(1460)의 모련 정벌은 바로 별종 오랑캐를 토벌한 것이었다.

 오랑캐·오도리족은 바로 근경 여진으로서 농경생활을 하였으나, 내지의 우디캐족은 삼림에서 수렵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몹시 거칠고 사나웠다. 만주의 동부지역 목단강·수분하 일대에 살던 야인여진으로서 嫌眞우디캐(七姓우디캐)와 尼麻車우디캐·南訥우디캐 등은 호전성이 강하고 약탈을 좋아하여, 조선의 변경을 자주 침입·약탈하였다. 두만강 하류 연해주 일대에서 어업을 하던 骨看우디캐는 비교적 온건하여 조선에 복속하였고, 해서여진의 忽刺溫우디캐는 요동지방과 가까워서 명과 빈번한 접촉이 많았으나, 상대적으로 조선과는 교섭이 적었다. 조선에 침입·약탈한 여진은 주로 만주 동북지방의 사나운 야인여진이었는데. 성종 22년(1491)의 許琮과 成俊의 정벌은 鬱地[wedi]567)wedi는 만주 동북지방 타이가(Taiga) 지대의 숲을 말하는데, 우디캐라는 말도 wedike로서 ‘숲속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에 살던 니마거우디캐를 정벌한 것이다.

 뒤에 興京에 자리잡은 건주 3위의 세력이 점차 강성하여지자, 두만강 유역의 藩胡들이 이에 복속하고 조선에 반항을 하였다. 명종 이후 선조대에는 이러한 번호들의 발호를 주로 토벌하였다. 조선 초기에 단행한 큰 규모의 여진정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10년 3월에 모련 오랑캐를 정벌하였다.568)≪太宗實錄≫권 13, 태종 10년 3월 을해. 혐진우디캐가 경원부에 침입해서 병마사 韓興寶를 살해하자, 조선에서는 모련 오랑캐가 내지 우디캐와 작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吉州道察理使 趙涓이 현지의 군사를 징발하여, 助戰節制使 辛有定·金重寶, 慶源兵馬使 郭承祐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서 3월 9일에 豆門에 도착하여 毛憐衛를 정벌하였다. 이 때 모련위 指揮 把兒遜·阿古車·著和·千戶 下乙主 등 4인의 추장을 죽이고, 그 부족 수백 명을 소탕하고 가옥을 불태운 다음에 남녀 약간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군사 행동은 모련의 두문에 한정되었으므로 단 1일만에 끝났다. 이것이 태종대에 있었던 모련위정벌인데, 조선이 단행한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던 셈이다.

 세종 15년(1433) 4월에는 파저강의 건주위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파저강 오랑캐 林哈刺 등이 홀라온우디캐와 작당하여 4백여 騎가 압록강 閭延에 침입하여 조선 군민 53명을 죽이고 77명의 농민과 우마를 약탈하여 갔기 때문이다.569)≪世宗實錄≫권 60, 세종 15년 4월 을유. 4월 10일에 평안도도절제사 崔閨德은 평안도 馬·步 正軍 1만 명과 황해도 군마 5천 명을 江界府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군사의 부서를 나누어 中軍節制使 李順蒙은 2,515명의 군사로써 오랑캐의 본거지 이만주의 寨星를, 左軍節制使 崔海山은 2,070명의 군사로써 車餘 등지를, 右軍節制使 李恪은1,770명의 군사로써 馬遷 등지를, 助戰節制使 李澄石은 3,010명의 군사로써 兀刺 등지를, 金孝誠은 1,888명의 군사로써 林哈刺 부모의 채리를, 洪師錫은 군사 1,110명으로써 八里水 등지를, 최윤덕은 2,599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임합라의 채리를 각각 토벌하였다. 4월 19일까지 9일 동안 동가강·渾河일대의 오랑캐 본거지를 유린하여 남녀 248명을 생포하고, 183명을 참살하고, 소 110두, 말 67필과 角弓·環刀 등 무기류 다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사전에 조선에서는 파저강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으나, 건주위 오랑캐들은 이를 미리 알고 대부분 부락을 버리고 도피하였기 때문에 건주위 도지휘첨사 이만주를 놓치고 말았다.570)≪世宗實錄≫권 60, 세종 15년 5월 기미.

 세종 19년 7월에 평안도절제사 李蕆이 제2차로 파저강 야인을 정벌하였다.571)≪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7월 기유. 上護軍 李樺는 1,818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兀刺山 남쪽 紅拖里를 징벌하고, 대호군 鄭德成은 1,203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阿間을 정벌하고, 이천은 여연절제사 洪師錫과 강계절제사 李震과 함께 4,772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瓮村 吾自站, 吾彌府 등지를 정벌하였다. 9월 2일에서 16일까지 15일간에 걸쳐 이만주의 본거지 올라산을 정벌하였는데, 적 60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세조 6년(1460) 浪孛兒汗의 아들 浪伊升巨가 阿比車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咸吉道都體察使 申叔舟를 보내어 모련의 東良北을 정벌하였다.572)≪世祖實錄≫권 21, 세조 6년 9월 갑신. 吉州牧使 吳益昌이 步·騎 8백 명을 거느리고 鏡城을 출발하여 吾村嶺을 넘어 朴加非刺·上東良을 정벌하였고, 寧北鎭節制使 康純이 보·기 9백 명을 거느리고 富寧을 출발하여 虛水刺와 中東良을 정벌하였다. 郭連城은 보·기 6백 명을 거느리고, 會寧鎭節制使 林得楨과 安邊府使 禹貢은 보·기 1,300명을 거느리고, 穩城鎭節制使 金處智는 보·기 6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회령에 이르러 楊汀의 지휘 아래 회령을 출발하여 두만강 중류의 下東良 일대와 모련 일대를 정벌하였다. 신숙주는 보·기 4천 명을 거느리고 鍾城을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愁州 일대를 공격하고, 北靑府使 趙邦霖은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常家下를 공격하였다. 강원도관찰사 金繼孫은 慶源節制使 金貴孫과 함께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甫伊下를 공격하였으며, 신숙주는 洪允成·李克培 등과 더불어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阿赤郎貴를 정벌하였다. 이 싸움의 전과로서 적 130여 급을 참획하고, 9백여 채의 가옥과 재산을 불태우고, 우마 1천여 두를 노획하였다.

 세조 13년(1467) 명에서 건주위의 이만주를 정벌하였는데, 조선에서도 함께 출병하여 협공하였다.573)≪世祖實錄≫권 44, 세조 13년 10월 임인. 이듬해 10월에 主將 康純과 右軍大將 南怡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滿浦津에서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의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이것이「成化 3년의 役」이다. 그 전과는 대단하여 이만주와 그 아들 古納哈 등24인을 참살하고 이만주의 처자 등 부녀자 24명을 포로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175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가옥과 쌓아둔 곡식을 불살랐다. 左軍大將 魚有沼는 高砂里에서 두만강을 넘어 이만주의 본거지인 兀彌府를 공격하여, 71명을 참살하고 수많은 병기와 우마를 노획하였다. 이 때 동원된 군사의 숫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성종 10년(1479) 명의 요청으로 右贊成 어유소를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건주위를 다시 정벌하게 하였다.574)≪成宗實錄≫권 112, 성종 10년 12월 신미. 그러나 두만강의 물이 얼지 않아서 출병을 연기하였다가 尹弼商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정벌을 단행하였다. 윤필상은 12월에 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李惇仁·李叔琦·曺幹 등에게 각각 精兵 1백여 기를 거느리게 하고, 부원수 金嶠는 遊軍 50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 자신은 輕騎 3백 명을 거느리고 건주여진을 공격하여, 적 17명을 사살하고 漢人 7인과 야인 15명을 노획하고, 수많은 가축과 家舍를 불태웠다.

 성종 22년 10월에는 내지 우디캐를 정벌하였다.575)≪成宗實錄≫권 258, 성종 22년 10월 병인·11월 임인. 永安道觀察使 許琮을 도원수로 삼고, 永安北道節度使 成俊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만 명 중에서 4천 명을 골라서 9부대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우디캐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니마거우디캐의 지역까지 이르렀을 때, 우디캐족이 이미 도망가서 산 속에 숨어 버렸기 때문에 그 전과는 그다지 크지 못하였다. 도중에서 맞닥뜨린 우디캐를 죽이거나 생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 대규모의 여진정벌이 있은 뒤 명종 9년(1554)에 李思曾의 정벌과 선조 16년(1583) 李濟臣의 정벌, 선조 20년에 李鎰의 정벌이 있었으나, 모두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여진정벌은 일시적인 응징의 성격을 띠었다. 세종대에 4군과 6진을 개척한 것처럼 정복한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개척하지는 아니하였다. 말하자면 군사를 일시에 동원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소굴을 공격하여 그 세력을 소탕한 다음 군사를 즉시 후퇴시켜 인명의 손실을 막았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