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1) 대여진정책
  • (3) 국토개척

(3) 국토개척

 세종은 사대교린정책을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조선의 국토를 개척하였다. 처음에 세종은 국토개척의 목표를 당시 두만강 북쪽 7백 리 지점에 있다고 알려진 公嶮鎭 일대까지로 잡았다. 태종대에 명에 漫散軍民을 송환하면서 명 성조로부터 공험진 이남이 조선의 영토라는 확답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세종은 국토 개척에 있어서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김종서로 하여금 고려 尹瓘의 9성의 유적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두만강 북쪽 7백여 리 떨어진 지점에서 윤관이 공험진에 세운 비를 찾아냈다.576)≪世宗實錄≫권 86, 세종 21년 8월 임오. 이곳은 오늘날 綏芬河지역이라고 추측된다.

 세종 15년(1433)에 건주위의 여진세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두만강 유역의 오음회에 자리잡았던 건주좌위 都指揮使 오도리족의 대추장 퉁멍거티무르가 楊木荅兀과 우디캐족의 침략을 받아 그 부자가 죽임을 당하고, 오도리족의 본거지가 불타버리고, 오도리족의 다수가 우디캐에게 사로잡혀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세종은 이 시기야말로 동북면을 개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세종 15년(1433)부터 30년까지 김종서·이징옥 등을 보내어 동북면 일대를 개척하고 다음과 같이 6진을 설치하였다.577)≪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吉道 慶源·會寧·鍾城·穩城·慶興·富寧都護府.

 慶源都護府는 처음에 야인에게 점거되었다가, 태조 7년(1398)에 처음으로 孔州府를 설치하고 경원이라 이름하였다. 태종 9년(1409)에 경원부를 蘇多老燕基로 옮겼으나 태종 10년에 부사 한흥보가 야인의 침입을 받아 살해당하자, 그 땅을 비워 두었다가 태종 17년에 다시 도호부를 富居站에 설치하고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세종 15년에 퉁멍거티무르 부자가 우디캐족에게 피살당하자, 세종 16년에 옛 국토를 회복하기로 의논하고 소다노의 땅이 기름지고 적이 오가는 길의 요충지가 된다고 하여 會叱家의 땅에다 성벽을 설치하고 南道의 민호를 이주시켜, 경원부를 옮기고 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그리고 세종 24년에 鎭節制使를 두었다.

 會寧都護府는 속칭 吾音會라 하는데 오랑캐 말로는 斡木河였다. 오음회의會字를 취하여 會寧府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퉁멍거티무르가 살다가 세종 15년에 우디캐족에게 침략을 받아 추장이 없어지자, 이듬해 봄에 石幕의 寧北鎭을 伯顔愁所로 옮기고, 이 지역이 여진과 인접하고 북쪽으로 敵路의 요충지라고 하여, 특별히 성벽을 설치하고 회령진절제사로 하여금 이를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회령진이 영북진과 거리가 너무 떨어져 서로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오음회에 진을 설치하였다가 도호부로 승격시켜 절제사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

 鍾城都護府는 원래 야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愁州라고 하였는데, 세종 16년 봄에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옮기고 곧 따로 회령진을 알목하에 설치하고 영북진에다 僉節制使를 두었다. 세종 17년에 영북진에 鍾城郡을 설치하여 진절제사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다가, 세종 22년에 수주가 적로의 요충지라고 하여, 옛 성을 도절제사의 行營으로 삼고 세종 23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穩城都護府는 야인들이 차지하여 살던 多溫平인데, 溫字를 취하여 온성이라고 하였다 한다. 세종 22년에 처음으로 군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종 23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慶興都護府는 옛 孔州의 땅인데 태조 7년에 옛 도성 터에다 석성을 다시 쌓고 이름을 慶源府라고 고쳤다. 태종 10년에 야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이곳을 포기하였다가, 세종 16년에 다시 경원부를 회질가의 땅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공주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방어하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그 성을 수축하고 만호를 임명하였으며, 세종 17년에 공주 근방에 3백 호를 이주시켜 孔城縣이라 일컫다가 세종 19년에 군으로 승격시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세종 2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富寧都護府는 본래 鏡城郡 石幕 上平의 땅이었는데, 세종 14년에 이 땅이東良北 야인이 왕래하는 요충지라고 하여 영북진을 설치하였다가, 세종 16년에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옮기고, 석막의 옛 땅은 土官 千戶로서 방어하게 하다가, 세종 31년에 富居縣을 혁파하고 민호를 석막으로 옮긴 다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와 같이 세종은 집권 후반기 15∼16년 동안 꾸준히 여진을 회유하거나 정복하여 6진을 설치함으로써 두만강 일대까지 국토를 개척하였다. 또 남도의 민호를 북방으로 꾸준히 이주시켜 여진보다도 조선 민호가 우세하도록 하였다.≪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여 6진을 개척하기 이전과 개척한 이후의 호구수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표 1>·<표 2>와 같다.

지 역 戶 數 口 數
慶 源
鏡 城
291
409
3,233
9,031
합 계 700戶 12,264口

<표 1>세종 14년(1432) 두만강 유역의 동북면 일대의 호구수

지 역 戶 數 口 數
會 寧
鍾 城
穩 城
慶 源
慶 興
624
900
800
1,162
402
2,157
21,815
3,637
5,271
5,058
합 계 3,888戶 37,938口

<표 2>단종 2년(1454) 5진의 호구 수

 이로 보아 5진이 개척된 이후 증가된 호구수는 3천 2백여 호, 2만 6천여 구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정부에서 2만 8천여 호 정도를 사민하였다고 하나, 실제로 사민에 의하여 증가된 호수는 3천 2백여 호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에 이러한 사민은 삼남지역 등지에서 富戶를 차출하여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578)深谷敏鐵,<朝鮮世宗朝に於ける東北邊方への第1·2·3·4次徙民入居について>(≪朝鮮學報≫9, 12, 14, 21·22, 1956, 1958, 1959, 1961).

 4군 지역의 개척은 최윤덕과 이천을 보내어 파저강 유역의 오랑캐족을 정벌한 다음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閭延·慈城·茂昌·虞芮郡을 설치하면서 이루어졌다.579)≪世宗實錄地理志≫권 154, 江界都護府.

 여연군은 원래 갑산군 여연촌이었는데, 태종 16년(1416) 본군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여연군으로 만들어 평안도에 소속시켰다.

 자성군은 본래 여연군의 慈作里였는데, 세종 6년(1424)에 이곳에 목책을 세우고 방어하였다. 세종 14년 파저강의 야인들이 몰래 들어와서 사람을 살육·약탈하였으므로, 자작리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강계부의 관할로 삼았다.

 무창군은 여연군의 上無路堡인데, 세종 22년에 여연과 너무 멀리 떨어졌다하여, 무창현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가, 세종 24년 무창군으로 승격시켜 강계부의 관할하에 두었다.

 우예군은 본래 여연군의 虞芮口子인데, 처음에 萬戶를 두었다가 세종 25년 본군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고 하여 우예군을 설치하고 강계부의 관할로 삼았다.

 세종 28년 4군과 6진 사이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지역을 보강하기 위하여 甲山郡 내어 三水郡을 설치하여 갑산군과 삼수군을 두었다. 그러나 개마고원의 산악지대에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으므로 그 유지가 대단히 힘들었다. 이리하여 4군을 철폐하자는 의논이 일어나 단종 3년(1455)에 4군 중에서 여연·무창·우예의 3군을 폐지하고 다시 세조 5년(1459) 자성군마저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폐4군은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군을 폐지하여 府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580)李仁榮,<鮮初廢4郡地理考(上·下)>(≪靑丘學叢≫29·30, 1937·1938).

 한편 세종은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을 따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한 行城을 쌓았다. 행성은 대개 강물이 얕은 지역에 쌓아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

 두만강 일대의 행성을 보면, 온성의 동쪽 立巖에서 시작하여 두만강변을 거슬러 올라가서 종성을 지나 회령부의 성 앞에까지 이르렀다. 높고 험한 곳에는 흙을 깎아내리고 평지에는 돌로 쌓아 올리고 강물이 얕고 습한 곳에는 鹿角과 말뚝(弋木)을 설치하였는데, 도합 2백여 리가 되었다. 또 갑산군 池巷浦洞口의 東峯에서 시작하여 옛 군영터에 이르는 행성이 1리 249보였고 삼수군 魚面江 東部에서 桑木坪에 이르는 행성이 29리 239보였다.581)≪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吉道.

 압록강 지역의 행성은 義州행성이 邑城 북쪽으로부터 九龍淵에 이르는 것이 6,720步이었고, 定寧행성이 玉岡洞口로부터 獐項峯에 이르고, 碧潼행성이 小波兒 松林峴으로부터 非所里平에 이르기까지 15리 50보였다. 이밖에 碧團口子행성(23리), 昌城 昌洲口子행성(14리 150보), 理山행성(10리 240보), 渭原행성(4리 190보), 江界 滿浦口子행성(14리), 高山里口子행성(7리 3보), 慈城 池寧怪행성(1리 108보), 虞芮口子행성(6리 295보), 閭延 趙明干口子행성(31리 195보)이 있었다. 또 西解峴으로부터 時反江에 이르기까지와 泰日로부터 北邊泂口 암석에 이르기까지의 행성이 도합 11리 56보였다.582)≪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및 권 155, 咸吉道.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