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2) 사신의 왕래
  • (1) 건주 3위 여진

(1) 건주 3위 여진

 조선 전기 여진족은 지역적으로 나누면 建州여진·海西여진·野人여진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 건주여진이었다. 종족적으로 나누면, 오도리족·오랑캐족(火兒阿족)·우디캐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건주여진은 오도리와 오랑캐였고,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은 우디캐족이었다. 우디캐족은 산림에서 살던 사람들을 통칭한 것이며, 조선과 명의 변경지역에 살던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불렀다. 建州3衛를 이러한 종족에 의하여 구분하면, 建州本衛는 오랑캐세력으로서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동가강)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다. 建州左衛와 建州右衛는 오도리족으로서 두만강 중류 海蘭江과 목단강 상류 일대에 거주하였으나, 건주좌위 대추장 퉁멍거티무르가 세종 15년(1433)에 피살된 후 서쪽으로 옮겨가 건주본위의 거주지역으로 합쳐졌다.

 건주3위의 오도리와 오랑캐는 고려 말엽의 토착 여진과는 구분되는데, 고려말엽의 건주3위 세력이 목단강을 따라 남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남하한 것은 원말 納哈出[나하추] 세력이 만주에 웅거하면서 동북면 일대의 여진인들을 대거 약탈하여 갔기 때문이다. 처음에 오도리 만호부는 두만강 중류 오음회 지역에 정착하여 조선에 복속하였다.583)金九鎭, 앞의 글. 태종은 오음회의 오도리 만호부의 대추장 퉁멍거티무르를 초무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오도리족을 동북지방의 변경지역에 묶어 두어 내지의 우디캐를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맡게 하는 한편, 동북면 일대의 여진족을 오도리 만호부의 세력하에 묶어 두어 동북면 일대의 모든 여진족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한편 오랑캐 세력은 압록강의 지류 파저강 일대에 자리잡고, 명 성조 5년(1407) 명에 입조하여 성조로부터 건주위를 설립받았고 오랑캐 만호부의 대추장 阿哈出(於虛出)이 건주위지휘사로 임명되었다.584)≪明太宗實錄≫권 24, 永樂 원년 11월 신축. 명에서는 건주위의 오랑캐를 통하여 남만주 일대를 경략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과 명이 남만주의 경략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585)和田淸,<明代滿洲の經略>(≪東亞史硏究≫滿洲篇, 東洋文庫, 1955).

 명 성조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원의 나하추 세력을 항복시키고, 여러 여진족들을 초무하여 복속시킨 다음 衛所를 설치하였다. 명은 요동지역에 遼東邊墻을 쌓고 이 지역에 살던 한족과 고려인 및 여진족을 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25衛에 소속시켰고, 변장 바깥에 살던 여진족들이 명에 복속하면 그 지역에 위소를 설치하였다. 명 태조대부터 성조대까지 설치한 위소는 184위 20소에 달하였다.586)楊暘·袁閭琨·傳郎云, 앞의 책. 일단 만주경략을 끝낸 성조는 명의 위소의 직위를 받은 여진인 추장들에게 조선에 입조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변경 가까이에 살던 여진족들은 조선에 입조하여 복속하고 조선의 관작을 받았다. 이것은 조공을 통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던 생필품을 얻기 위해서였다. 명은 요동변장 밖의 만주 내지에 살던 여진족들을 지역적으로 건주·해서여진으로 구분하였지만, 여진족들은 실질적으로는 정치면에서 거의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으며, 명과 조선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한 복속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다. 명에서는 건주·해서·야인여진을 통할하기 위하여 명 성조 7년 윤 4월에 內官 亦失哈 등을 보내어 송화강·흑룡강이 합류하는 奴兒干[누르칸]에 누르칸 都司를 설치하여 184위와 20소를 이에 소속시켰다.587)楊暘·袁閭琨·傳郎云, 위의 책, 54∼63쪽.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여진족을 통할하지 못하고 그 자치에 맡겼으며, 오로지 羈縻政策 아래 두었을 뿐이다. 기미정책이란 말뚝에 매어둔 소나 말이 고삐를 채운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여진족이 조공을 하는 한, 그 내부의 통치권이나 打圍放牧 등의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그 후 명에서는 명 성조 11년 가을에 滿涇站의 언덕 왼쪽에다 永寧寺를 짓고 永寧寺碑를 세웠다.588)楊暘·袁閭琨·傅郎云, 위의 책, 勅修奴兒干永寧寺碑記. 그러나 영령사는 곧 원주민인 여진족들의 반항으로 누르칸도사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압록강 유역에 자리잡은 오랑캐세력과 두만강 유역에 자리잡은 오도리세력은 각각 명과 조선에 복속하여, 남만주지역 일대에 살던 여진족들의 통솔권을 놓고 서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명에서는 천호 高時羅·사신 王敎化的 등을 보내어 오음회의 퉁멍거티무르를 초무하여 결국 명에 입조시켰다. 퉁멍거티무르는 태종 5년(1405) 9월에 명에 입조한 뒤 명으로부터 건주좌위라는 위소를 설립받았다. 세종 15년 오음회의 건주좌위 도지휘사 퉁멍거티무르가 우디캐의 침입을 받아 횡사하자, 건주좌위의 오도리족은 흩어져 대부분 건주본위의 오랑캐세력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주좌위의 印信을 잃어버리자, 퉁멍거티무르의 손자 童倉(童山)과 그 동생 童凡察이 건주좌위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明武宗 7년(1512) 2월에 명에서는 건주좌위를 나누어 건주우위를 새로 설치하고, 우위의 인신을 만들어 동범찰을 건주우위 都督同知로 임명하고,589)≪明英宗實錄≫권 89, 正統 7년 2월 갑진. 동창은 건주좌위를 맡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른바 건주3위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