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2) 사신의 왕래
  • (2) 여진추장의 조공

(2) 여진추장의 조공

 여진은 명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조공을 하였다. 지리적 관계로 건주여진이 조선과 빈번히 교섭을 가졌고 내지의 해서·야인여진도 끊임없이 조공하여 왔다. 특히 지리적으로 명보다는 조선과 교섭을 갖는 것이 유리하였던 야인여진이 조선에 입조하는 경우가 많았다.590)조선에 가장 많이 입조한 야인여진은 綏芬河 일대에 살던 尼麻車, 南訥(突), 都骨 등의 우디캐와 牧丹江과 松花江 하류에 살던 嫌眞우디캐였다.

 여진은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명에 입조하여 위소를 설치받았고, 명의 관직과 勅書를 받은 대소 추장들은 조선에도 입조하였다.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던 건주좌위와 모련위의 여진족들 중에는 조선에 복속하여 都萬戶, 萬戶 등의 관직을 받았으나, 명 성조의 초무를 받아 명에 복속하여 명의 관직과 칙서를 받은 자들도 있었다.

 이처럼 대다수의 여진은 명과 조선의 양국에 입조하여 조공을 하고 관직을 받았다. 양국에 조공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화를 더 많이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91)江島壽雄,<明代女直朝貢貿易の槪觀>(≪史淵≫77, 1958).

 그러나 명은 원칙적으로 명에 복속한 여진족들과 조선 간의 교통을 금지하였다. 다시 말하면 명의 관직을 받은 대소 여진의 추장이 조선에 입조하여 조선의 관직을 갖는 것을 기미정책에 위반되는 불복의 행위로 간주하였다. 명 태조 때 고려와 원의 세력이 결탁할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으며, 원의 세력이 몰락한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세력이 결합하는 것을 대단히 꺼려하였다. 만주지방의 여진족들 거의 모두가 명의 세력에 굴복하여 명의 조정에 입조하여 관직을 받기에 이르자, 명에서는 조선과의 교통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추장들은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조공을 하고 관직과 告身을 받았다.

 명의 위소 가운데 조선에 입조하였던 위소는≪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79위였다. 만주지방에 설치된 전체 184위의 약 43%가 조선과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여진의 대소 추장은 명의 위소와 관직을 숨기고 조선에 입조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조선에 조공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비록 중국에서 높은 벼슬을 받은 여진의 추장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조선과 여진의 관계에서 다시 평가하여 관직을 주었다. 중국에서 받은 관직을 조선에서 그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나, 세력에 따라 관직의 고하가 정해졌기 때문에 대개 명에서 제수받은 관직에 상응하는 관직을 조선으로부터 받는 것이 상례였다. 여진이 명과 조선에 이중적으로 조공하는 관계를 가짐에 따라, 여진이 조선에 조공한 토산물 가운데 모피류는 다시 조선에서 명에 조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진이 조선에 조공하는 것은 명과 여진의 관계처럼 대소 여진의 추장이 개별적으로 교섭하는 이른바「개별적 조공관계」였다. 여진족들이 조선에 입조한 횟수는<표 3>과 같다.

 <표 3>에서 보면, 건주여진의 兀良哈[오랑캐]과 斡朶里[오도리]족이 650여 회의 입조를 하였으나,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의 우디캐족은 430여 회의 입조를 하였다. 이로 보아 조선의 국경 가까이에 있었던 건주여진의 오랑캐가 가장 많은 교섭관계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明實錄≫을 분석하면, 명과의 교섭관계를 가진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입조횟수가 각각 369회와 836회였는데, 이로 보아 건주여진은 조선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해서여진은 명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표에서 주목되는 점은 성종 연간을 마지막으로 건주여진의 조공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다. 15세기까지 긴밀하였던 조선과 건주여진의 조공관계가 16세기에 들어와 악화된 것은「成化 3년의 役」에서 건주여진의 대추장 이만주가 조선의 정벌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건주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지에 살고 있었던 해서여진이나 야인여진의 조공도 연산군과 중종대를 거친 후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명에 대한 조공은 16세기 명 말엽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는 여진사회에서의 조선의 물화에 대한 욕구가 감퇴한 반면에 명의 물화, 특히 견직물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전 거 土着女眞 兀 良 哈 斡 朶 皇 諸種兀狄哈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2


3

11






 
4
1
28
117
5
7
97
9
142






 
7

19
102
2
6
28
2
74






 


25
128

3
98
11
144
15
7




 
11
1
72
349
7
16
226
22
371
15
7
0
0
0
0
1
16회 411회 240회 431회 1,098회

<표 3>여진이 조선에 입조한 횟수

 여진인들이 조공을 하는 근본 목적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화를 구하려는 데 있었다.592)≪成宗實錄≫권 38, 성종 5년 정월 경술. 그러므로 명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가능한 한 여진인들의 입조하는 인원수와 그 규모를 축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입조하는 야인의 규모가 많을 때는 50내지 60인이었으나 적을 때는 30여 인이었다.

 입조한 여진의 대소 추장들을 접대하는 데에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낀 조선에서는 변방의 節制使(節度使)에게 명하여 입조하는 야인의 인원수가 20여 인이 넘지 않도록 규제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소 추장이 끊임없이 입조하여 세종 9년(1427) 봄에 입조한 야인의 수가 160여 인에 이르렀다.593)≪世宗實錄≫권 36, 세종 9년 4월 병자. 이리하여 조선에서는 여진의 입조하는 숫자를 종족별로 제한하는 구체적 정책을 취하였다. 세종 27년 11월에 매년 여진족들의 입조하는 횟수를 제한하여, 건주여진의 오랑캐는 10회씩, 骨看우디캐와 오도리족은 7회씩으로 각각 규정하고, 매번 추장이 입조할 때마다 正官 1명씩과 伴人 2∼4명씩을 대동하게 하였다.594)≪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1월 임신. 그러므로 조선의 변경에 살던 건주여진의 오랑캐·오도리와 골간우디캐가 1년에 24회 입조할 수 있었다. 1회에 대동할 수 있는 정관과 반인이 5명 내지 3명이었으므로, 1년에 입조하는 인원수가 10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세조가 집권하자,「李澄玉의 난」을 계기로 근경 여진족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많은 대소 여진의 추장을 입조시켰다. 세조연간에 여진족들의 입조 횟수를 보면, 건주여진의 오랑캐가 97회, 오도리가 28회, 해서·야인여진의 여러 우디캐가 98회, 도합 226회였다. 그러나 전체 횟수를 따져보면, 역시 세종연간의 규정을 넘지 않고 있다.

 또 세종 27년(1445) 11월에 내지 여진의 입조 횟수에 대한 규정을 보면, 忽刺溫우디캐가 1년에 입조하는 횟수를 5회로 규제하였으나,595)위와 같음. 근경 여진이 홀라온우디캐라 사칭하고 입조하여 賞賜를 요구하는 자가 많았다. 또 수분하유역에 사는 尼麻車·兀未車·巨節·南訥·高說·高漆 등의 우디캐족들은 1년에 입조하는 횟수를 2회로 규제하였다. 건주여진에 비해서 해서여진의 입조 횟수는 상당히 적었으며, 야인여진의 입조도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특히 주의할 점은 여진의 입조가 回賜物을 얻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추장이름을 사칭하고 입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조공제도가 문란해지게 되었다.

 여진의 대소 추장이 입조하려면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의 중심 세력권을 형성하였던 대추장의 印信書契(印信文書)를596)대추장의 都督掌印을 말하는데, 도독은 곧 건주위·해서위 도독으로서 貢勅, 또는 서계를 가지고 관하 인민의 입조를 직접 허가해주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발급받아야 하였다. 건주여진의 대추장 이만주는 조선에 인신서계를 발급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여진족들이 조선에 입조하려면, 오랑캐는 건주본위에서, 오도리족은 건주좌위나 건주우위에서 이러한 文印을 발급받았으며, 홀라온우디캐는 兀者衛에서, 니마거·올미거·대소 거절·남눌·고설·고칠 등의 우디캐는 각각의 대추장에게서 문인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조정의 입조횟수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입조시킬 수 없으면, 변방의 절제사가 추장이 使送한 문인을 받은 자를 경원 등의 5鎭에서 후하게 대접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서 되돌려 보냈다.

 여진이 입조한 貢路는 함경도의 5진을 거쳐 驛站을 따라 서울까지 들어왔다. 역참에서 입조하는 여진의 사절을 대접하였으며, 驛馬所에서 말을 지급하여 그들이 조공하는 짐발이를 운송하였다. 그러므로 역참 부근의 많은 농민들이 짐을 운송하는 데 동원되었다.597)≪世宗實錄≫권 103, 세종 26년 정월 갑인. 이리하여 한꺼번에 여진의 사절이 입조하는 것을 되도록 막았으며, 또 농한기를 이용하여 상경하도록 권장하였다. 명에서도 마찬가지로 10월초에 상경하여 늦어도 12월에 돌아가게 규정하였다.

 여진의 사절은 동대문 밖의 北平館에 머물렀다. 북평관은 처음에는 ‘野人館’이라고 불렀던 듯하며, 세종 20년(1438) 2월에 倭人의 東平館에 대하여 북평관이라 이름지었다. 여진인이 입조하는 편의를 위하여 지방에는 鄕通事가있었으며, 중앙에는 女眞通事가 있었다.

 여진의 사절이 조공하고 肅拜하는 일은 모두 예조에서 관장하였다. 입조한 여진은 북평관에서 유숙하여야 했고, 왕래할 때에도 역참의 여관에서 묵게 하여, 여염의 민가에서 묵는 것을 금하였다.598)≪經國大典≫권 3, 禮典.

 조선에서는 입조한 여진의 대소 추장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告身을 주었다. 조선에서 여진의 대소 추장에게 하사한 관직을 보면<표 4>와 같다.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말 선초에는 입조하는 여진의 추장에게 만호의 관직을 주었다. 오도리의 대추장 퉁멍거티무르가 입조하자 그에게 都萬戶를 주었다.599)≪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3월 기축.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서 입조하는 여진의 대소 추장이 격증하자, 조선의 일반 무관직을 제수하여 정3품 上護軍에서부터 종7품 副司正까지의 관직을 그 세력의 강약에 따라 각각 내려 주었다. 여진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관직이 곧 그 사회의 신분을 나타냈다. 여진의 신분을 4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관직과 신분이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았으나 호군과 만호는 대개 제1, 2등급이었고, 사정은 제4등급이었으며, 2, 3등급은 그 사이의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600)≪端宗實錄≫권 13, 단종 3년 3월 기사.

職 名 品 階 비 고
都 萬 戶
萬 戶
副 萬 戶
從 3 品
正 4 品
從 4 品
여말 선초 관직
上 護 軍
大 護 軍
萬 戶
護 軍
副 護 軍
司 直
副 司 直
司 正
副 司 正
正 3 品
從 3 品
正 4 品
正 4 品
從 4 品
正 5 品
從 5 品
正 7 品
從 7 品
일반 관직명
知 事
同 知 事
僉 知 事
正 2 品
從 2 品
正 3 品
中樞院 官職

<표 4>조선이 여진에게 제수한 관직

 이처럼 조선이나 명에서 사급받은 관직은 여진사회에서 그 신분을 형성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이나 명에서 여진의 세력의 강약에 따라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직이 단순한 虛職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여진세력과 신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