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3) 무역
  • (1) 무역소

(1) 무역소

 여진인들은 조공을 통하여 회사물과 상사물을 받았으나, 이러한 조공무역을 통하여 여진사회에 부족한 생필품을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조공무역에서도 北平關에서 제한된 짧은 기간 안에 開市가 허락되었으나, 도저히 여진사회의 생필품에 대한 욕구를 충당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대소 추장의 관할하에 있던 여진인들이 끊임없이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므로, 이것을 막기 위하여 변경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이 필요로 하는 물화를 공급하였다. 이것을 고려시대에는「榷場」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에는「무역소」라고 불렀다. 이러한 무역소를 통하여 여진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공급하고, 여진사회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수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여진이 거주하던 동북면 일대에 각장을 설치하여 매매하였다. 고종 11년(1224)에 東眞國의 사신이 와서 여진지역의 靑州와 고려 동북면의 定州에다 각각 각장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602)≪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1년 정월 무신. 고려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오늘날의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인과 고려인간에 매매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례에 의하여 매매를 하자고 제안한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여진과 고려 사이에 교역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말 선초에도 이러한 교역이 꾸준히 계속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려 때처럼 동북면 지역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과 교역을 하였다. 태종 6년(1406)에 朴信의 주장에 의해 동북면의 경성과 경원 2군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인들로 하여금 소금과 철 등의 생활 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603)≪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5월 신축. 만약 여진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그 교역을 단절시키면, 생필품을 구하지 못한 여진인들이 노략질을 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소금이나 철 등의 생필품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무역소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고려 때부터 꾸준히 국경상에서 이루어진 교역장소를 경성과 경원의 2곳으로 한정하여 공식적인 互市를 허락했던 것을 말한다. 즉 실제 민간인들 사이에 국경상에서 사무역이 꾸준히 행해졌으나, 이에 따르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원의 감시하에 공무역을 허락하였던 것을 뜻한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가 약화되거나 여진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에는 공무역이 수시로 폐지되었으며, 그 결과 사무역이 많이 행해졌다.

 태종 6년에 박신에 의하여 경성·경원지역에 무역소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나온 계기는 그 해 2월에 혐진우디캐 金文乃[乞文那] 등이 경원의 소다노에 침입한 데 있었다. 김문내의 침입은 조선에서 경원의 開市를 폐지하여 생필품을 구득할 수 있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일어났다.604)≪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2월 기묘. 처음에 조선에 복속하

 던 동북면 지역의 오도리족과 모련오랑캐가 명에 입조하자,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변경에서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교역 금지로 실질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목단강 유역에 살던 혐진우디캐족이었다. 이리하여 혐진우디캐의 김문내·葛多介[可兒答哥] 등은 모련오랑캐와 오도리족의 일부 세력과 결탁하여 300여 기를 이끌고 경원부를 침략하여 병마사 한흥보를 살해하였다.605)≪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2월 경자. 조선에서는 태종 10년 趙涓에게 명하여 靑州(북청) 이북의 각 고을에서 군마 1,150필을 징발하여 모련위 여진을 정벌하였다.606)≪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2월 기미.

 이처럼 조선의 모련위 정벌은 그 발단이 경원의 무역소를 폐지한 데 대한 여진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나 소강상태일 때에는 침략과 전쟁보다는 사적·공적 무역을 통하여 교역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였다.

 경성과 경원의 무역소에 대한 기록은 15세기 중엽 5진이 설치된 이후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5진이 설치된 이후 5진의 부근에 살던 城底의 야인들이 항상 성안에 살던 조선인과 교역을 행하여 특별히 조선 초기처럼 무역소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성저 야인이 교역을 하던 5진을 중심으로 하여 성저의 교역이 활발히 행해졌으므로 이를「5진의 성저무역소」라고 할 수 있다.

 당시 5진은 두만강 유역에 설치되어 여진지역과 바로 접해 있었다. 5진은 세종이 金宗瑞·李澄玉 등을 보내어 함길도 지역을 개척하고 설치한 6진 가운데 會寧·鍾城·穩城·慶興·慶源의 5都護府를 말한다.607)≪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吉道. 富寧은 두만강에서 떨어져 내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서 제외되었다. 세종은 6진을 개척한 다음 4차례에 걸쳐 남방의 민호를 2,200여 호나 이 지역에 이주시켜 농토를 경작하게 하였고, 각 진의 부근의 땅에는 조선에 귀부한 여진족들을 살게 하였다. 회령 성저에는 오도리족이 살고, 경흥 성저에는 골간우디캐가 살고, 나머지 종성·온성·경원의 성저에는 오랑캐가 각기 거주하였다. 이들은 성내의 조선인과 수시로 만나 교역하였다.608)≪成宗實錄≫권 254, 성종 22년 6월 계축.

 야인들의 철제농구는 모두 성저 야인이 무역한 것이었다.609)≪成宗實錄≫권 269, 성종 23년 9월 을미. 내지 우디캐 지역에서도 5성의 성저에서 교역을 하려고 여진이 왕래하였다.610)≪成宗實錄≫권 49, 성종 5년 11월 신사. 성저 야인들은 조선인들과 사무역을 행하고, 다시 내지의 여진인들에게 물건을 轉賣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원칙적으로 사무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인의 이러한 사무역을 엄금하였다.611)≪經國大典≫권 5, 刑典, 禁制. 그러나 이러한 사무역은 後市로서 점점 성행하였으므로, 결국 淸代에 들어가 만주인의 압력으로 인조대에 會寧의 開市가 성립되어 互市로 공인되었다.

 한편 명에서도 중국물화에 대한 여진사회의 욕구가 팽배하여지자, 이러한 욕구를 무역을 통하여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여진인들의 침입과 약탈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회유책으로서 요동 변방의 관문에 ‘馬市’라는 무역소를 설치하였다.612)≪明史≫권 81, 食貨志, 市舶司.

 이러한 중국의 무역소를 ‘마시’라고 불렀던 것은 명에서 필요로 하는 북방의 胡馬를 주로 이 무역소를 통하여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마시는 여진인측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 아니라, 명측에서도 군용으로 필요하였던 말을 교역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동지방의 마시는 명 성조 3년(1405) 3월 廣寧과 開原에 임시로 설치되었다.613)≪明太宗實錄≫권 34, 永樂 3년 3월 계묘. 그 뒤 말을 팔러오는 자가 점점 많아지자, 다음해 3월에 정식으로 마시를 설립하고 여진과의 교역을 정례화시켰다.614)≪明太宗實錄≫권 41, 永樂 4년 3월 갑오. 그 결과 마시라는 공무역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會同館의 개시와 아울러 명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무역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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