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3) 무역
  • (3) 서계

(3) 서계

 명에서는 입조하는 여러 여진족들의 추장들에게 勅書(貢勅)를 주어 그들이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다. 조선에서도 복속 입조하는 대소 여진의 추장에게 관직과 印信을 주었다. 이처럼 관직과 인신을 받은 추장이 그 관직과 입조의 권한을 조선으로부터 인정받은 증서가 書契인데, 명의 칙서와 같다.

 조선에서 여진인 추장에게 준 인신과 서계가 여진사회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 이권과 정치적 특권으로서 통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여진이 경성·경원 등지의 무역소를 통하여 활발히 거래하고, 조선에 입공하는 등 빈번하게 왕래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에서 받은 서계는 무역과 조공의 이권을 인정받는 증서로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건주본위 이만주 관하인으로서 조선의 서계를 받은 여진의 대소 추장은 조선에서 조공과 교역의 이권을 보장받았다.630)≪世祖實錄≫권 32, 세조 10년 정월 임신. 따라서 조선의 서계는 이권증서로서 여진사회에서 중요시되어 쟁탈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조선은 건주여진의 오도리족 중 童凡察의 인신과 서계가 있는 확실한 신분이 아니면 입조하지 못하게 하였다.631)≪世宗實錄≫권 98, 세종 24년 11월 갑자. 또 이만주의 관하에 있는 건주본위의 오랑캐가 조선에 입조할 때에도 이만주의 인신이 적힌 서계가 없으면 입조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만주의 허락이 없이는 통상할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632)≪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7월 신미. 이로 보아 인신·서계는 입조와 매매를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서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서계를 발행한 범위는 건주여진에 국한되지 않고 해서여진의 火刺溫우디캐나 야인여진의 嫌眞우디캐, 尼麻車우디캐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은 해서여진의 忽刺溫우디캐 지역에도 서계를 발급하여 인신과 서계가 없으면, 입조하지 못하게 규제하였다.633)≪世祖實錄≫권 6, 세조 3년 2월 을미. 또 추장이 使送한 사람은 물론이고 조선에 입조하려는 여진족들은 반드시 관할 대추장(掌印都督)이 발급하는 문인을 가져야만 입조할 수 있었다. 일종의 여행증명서인 文引을 발행할 수 있었던 대추장은 조선으로부터 그 세력을 인정받아 관직에 임명되고 서계를 받은 추장들이었다. 조공을 통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인을 발급할 수 있는 여진의 대추장은 여진사회에서 상당한 실력자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조선으로부터 서계를 받고 문인을 발급할 수 있었던 여진의 대추장은 건주좌위 오도리족의 퉁멍거티무르와 오랑캐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던 압록강 유역의 건주위 오랑캐 어허추와 그 손자 이만주였으며, 그 밖에 骨看우디캐 추장 金豆稱改 등이 있었다. 퉁멍거티무르가 세종 15년(1433)에 혐진우디캐에게 피살당한 뒤에 그 아우 동범찰과 그 아들 童倉(童山) 등이 건주좌위·건주우위의 대추장이 되어 건주본위의 이만주와 함께 건주위 오도리족·오랑캐의 문인을 발급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범찰과 동창이 전주본위 이만주의 鳳州地域으로 옮겨가자, 두만강 유역의 170여 호의 오도리족이 남게 되었다. 이들을 지배하게 된 추장은 퉁멍거티무르의 아우 童於虛里였다.

 이 때 동어허리는 서계를 하사받고 문인을 발급할 수 있는 권리와 그의 아들 童所老加茂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여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다.634)≪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7월 무자. 이것은 추장이 관하 민호를 統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유역에 남아있던 오도리의 잔존세력을 실제로 통솔하던 동어허리와 그 아들에게 서계를 발급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주었고, 그 후 두만강 일대의 오도리족이 조선에 입조할 때에는 반드시 이들이 발급하는 문인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과 사이가 나빴던 건주본위 이만주도 그의 관하인이 조선에 입조할 때 문인을 발급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만주의 관하 여진으로서 입조하던 대소 여진 추장들에게 이만주가 발급한 문인을 소지해야만 그 입조를 공식으로 허락하였고, 그들이 문인을 가져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회사물까지 지급하였다.635)≪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1월 임신. 이만주는 이러한 서계에 바탕을 두고 關文·批文의 공문서도 조선에 보냈다. 결국 이만주·동창·동소로가무 등은 서계를 가진 추장으로서 조선과의 교역관계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대추장들이었다.

 이로 보면 조선에서 발급한 서계는 명에서 사급한 칙서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는 여진뿐만 아니라 일본의 對馬島主에게도 이러한 권리를 주어서, 조선에 입공하던 왜인들에게 문인을 발급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주는 역대에 걸쳐 조선과의 교역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어 부를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계를 가진 여진의 추장들은 경제적 이권을 통하여 실질적인 권력기반을 닦아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명에서는 칙서와 勘合으로 주변의 조공국가를 통속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서계로써 여진과 일본을 통속하였다. 이처럼 칙서와 서계는 조선과 명이 동아시아의 사대교린관계를 경제적으로 정립하는 실질적인 통제수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636)中村榮孝,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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