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1) 대일외교의 성립
  • (1) 1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1) 1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조선 초기의 대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국제정세를 우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크게 소용돌이쳤다. 중국대륙에서는1368년 朱元璋이 明을 건국하였고 1391년에 이르러 北元이 멸망하였다. 이로써 북방민족의 중원지배가 끝나고 漢族에 의한 중국지배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있어서도 크나큰 변화요인이 되었다. 바로 다음해인 1392년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창건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장기간 내란상태였던 南北朝時代(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의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 통일정권을 구축한 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專制政治를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지향하였다.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자마자 ‘恢復中華’라는 기치 아래 대외정책의 기본을 朝貢制度의 재확립에 두고 주변국에게 入貢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369년 고려·琉球·安南의 사신이, 1371년에는 일본·크메르·태국의 사절이 각각 入明하는 등 동아시아 제국은 일단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명대는 조공제도가 형식적으로 가장 잘 정비되었고, 조공제도의 전형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 조선·중국·일본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자. 그런데 당시 세 나라의 주요 외교 과제는 신정권간의 상호 승인과 관계 설정이 목표가 되겠지만 당장의 외교현안은 여진과 왜구문제였다.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 太祖 李成桂는 고려말부터 친명정책을 주장해 崔瑩·李仁任과 대립하였고, 威化島回軍 이후에는 친명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건국 후 명의 조선에 대한 견제와 의혹으로 인해 갈등과 마찰이 없지 않았다. 명은 친여진정책을 취함으로써 북원의 잔재세력과 조선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조선도 여진인 회유정책을 썼는데, 이것이 명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 때는 鄭道傳을 중심으로 요동정벌계획이 추진되었고, 태조가 직접 陣圖訓練을 하는 등 위기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明太祖와 정도전이 죽은 후인 태종대부터 조선의 대명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즉 태종 원년(1401)에 이르러 誥命과 印信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사행의 횟수도 1年 3使制로 결정됨으로써 事大外交體制가 확립되었다.641)조선의 대명 사대정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공제도라는 형식적인 측면보다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사대외교의 실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국내적으로 보면 왕권의 대내적 지배력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취한 외교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은 이를 통해 국가의 안보를 확보하고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간의 외교현안은 왜구문제였다. 명 태조는 1369년 이후 3차에 걸쳐 일본 九州 征西府이 懷良親王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였던 왜구를 억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이 명에 사신을 파견한 후에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명 태조는 1380년 室町幕府[무로마찌 바꾸후]의 장군에게 詔書를 보내 왜구와 일본사신의 무례함을 책망하고 일본과 외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1399년「應永의 亂」을 진압하고 외교권을 전담하게 된 실정막부의3대 將軍 足利義滿[아시까가 요시미쯔]은 1401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사대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明成祖는 1403년 족리의만을「日本國王」에 봉하고 勘合貿易을 허락하였다. 족리의만이 명 중심의 책봉체제에 자진해서 들어간 이유는 국제적으로 외교권을 가진 통일정권으로서 인정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내의 제후들에게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며 對明使行貿易을 독점하려는 데 있었다. 명은 막부장군에게 책봉의 상징인 金印과 함께 무역 인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勘合符 100통을 주었다. 감합무역은 막부의 대명무역의 독점권을 보장해주는 것으로서 조공무역의 한 형태이다. 규정상으로는 10년 1貢에 使行員數는 200명, 배는 2척으로 제한하였으나, 막부는 초기에 거의 매년 무역선을 보냈다.642)田中健夫,<中世における明·朝鮮·琉球との關係>(≪對外關係と文化交流≫, 思文閣, 1982), 19쪽. 족리의만의 아들인 4대 장군 足利義持[아시까가 요시모찌]에 이르러 公家側의 압력과 명분론에 의해 명에 대한 조공관계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부가 독점한 사행무역의 이익은 막부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대명관계를 재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이 관계는 1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