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1) 대일외교의 성립
  • (2) 조일국교의 재개

(2) 조일국교의 재개

 여말 선초 대일관계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왜구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대일교섭은 왜구 금압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으며 외교와 통상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왜구문제는 당시 조선·명·일본 세 나라 신정권의 공통적인 외교과제였다. 조선과 명이 대일외교에 적극성을 띤 이유도 왜구의 금압과 被擄人의 송환문제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일정책의 목표는 남쪽 변경의 평화였고, 기본방식은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선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 실정막부에 승려 覺鎚를 보내 왜구의 금압, 피로인의 쇄환을 요구함과 동시에 修好할 것을 요청하였다.643)태조는 7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室町幕府 앞으로 3회, 九州探題·大內義弘·對馬島主 앞으로 4회 등 7회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는 왜구진압 문제로 태조가 얼마나 고심하면서 대일교섭에 적극적이었나를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족리의만은 答使를 보내 피로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측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족리의만이 아직 자국의 외교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 때 그가 보낸 답서는 相國寺의 승려 絶海中津의 명의로 하였고, 그 서계에서 자국의 將臣이 옛부터 외국과 通問한 일이 없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까지 막부장군이 외교권을 관장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644)이는 태조 7년(1398) 회례사 朴敦之가 일본에 갔을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대외교섭을 포기한 상태였고, 대신 일본을 대표해서 대외교섭을 담당할 기관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1366년 명이 대일교섭에 나섰을 때 막부가 아니고 征西府를 대상으르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때까지는 九州探題인 今川了俊과 西國地域의 유력호족인 大內義弘이 대조선외교에 직접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예를 들면 1398년 족리의만이 답사로서 使僧 儔久와 함께 100여 명의 피로인을 송환한 직후에 금천요준은 천수백 명의 피로인을 송환하는 식이었다. 구주지역의 호족들도 조선정부의 정책에 호응해 앞다투어 피로인 송환에 나섰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가 실정막부와 함께 서국지역 호족들과도 교섭하는 형태와 방식은 고려말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조선국왕과 막부와의 사절왕래를 계기로 점차 사적 교섭에서 공적 교섭으로 성격을 바꾸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외교사상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는 1399년이었다. 1388년 족리의만은 금천요준으로 하여금 일본의 대외교섭기관이었던 征西將軍府를 파괴시키도록 한 후 금천요준마저 방축하였고, 이어 1399년에는 대내의홍도 진압함으로써 구주지방을 막부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 때에 이르러 실정막부가 일본의 통일정권임을 대외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왜구에 대한 통제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외교권을 장악하게 된 족리의만은 대명·대조선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403년 족리의만이 명 중심의 책봉체제에 편입된 것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급진전되고 체계화되었다. 족리의만은 명과의 책봉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조선과의 통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645)足利義滿이 얼마나 대조선외교에 적극적이었나 하는 점은 그가 1401년 조선측의 사신을 보기 위해 직접 兵庫浦까지 나간 것과 명의 사절을 접대하는 곳인 京都의 北山第에서 조선국왕사를 맞아들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집권시 조선쪽에 7회에 걸쳐 사절을 보냈다.

 족리의만은 책봉체제에 편입된 이듬해인 1404년 使僧 周裳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 사실이≪朝鮮王朝實錄≫에는 태종 4년(1404) 7월에 “일본국왕 源道義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라고 기술되어 있다.646)≪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7월 기사. 그런데 이 사행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실정막부가 종래 외교승의 명의로 서계를 보내는 방식을 그만두고 일본의 주권자로서 조선국왕에게 직접 서계를 보냈다는 점과스스로 ‘일본국왕’을 칭하였다는 점이다. 이후부터 조선에서는 족리의만을 일본국왕으로서 접대하기로 하였고, 실정막부의 장군을 일본의 외교권의 주체로 인정하였다. 동시에 막부장군을 책봉체제 속의 일본국왕으로서 조선국왕과 동등한 자격으로 외교의례를 갖추도록 하였다.647)그런데 실정막부 장군과 일본국왕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足利義滿이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았을 때의 막부장군은 足利義持이었고, 족리의만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장군에서 물러나 淮三后의 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후에도 가끔 있었는데, 막부장군(征夷大將軍)과 ‘일본국왕’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점이 실정막부 권력체계의 하나의 특징이었다. ‘일본국왕’은 ‘동아시아국제사회에 있어서 일본의 중앙정권의 수령으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田中健夫,<足利將軍と日本國王號>,≪日本前近代の國家と對外關係≫, 吉川弘文館, 1987, 34∼35쪽).

 1404년 족리의만이 ‘일본국왕’의 자격으로 조선국왕에게 國書를 보내고 조선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양국 중앙정부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일 양국은 550여 년간에 걸친 국교단절 상태를 끝내고 국교를 재개하였다. 일본으로서는 9세기 중엽 통일신라와의 국교 단절, 遣唐使 파견 폐지, 발해와의 교섭 중지 이래 쇄국상태로 있다가 조선·명과 국교를 열게 됨으로써 비로소 국제무대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국왕과 실정막부 장군이 교린국의 입장에서 국서를 교환했다고 해서 바로 조일외교체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과의 통교체제는 중앙정부간의 일원적 관계만이 아니라 다원적 통교형태를 띠고 있었고, 막부는 그것을 통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통교체제의 정비가 필요하였으며 양국간 외교현안이었던 왜구문제 또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조선 전기 대일관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해 보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태조 원년(1392)에서 세종 원년(1419)까지로 중앙정부간에 국교를 체결하고, 왜구진압정책에 진력한 시기이다. 또 조선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왜구가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되었는데 조일통교의 성립기 내지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세종 2년(1420)에서 성종 2년(1471)까지이다. 이 시기는 대마도정벌 이후 文引制度 定約, 癸亥約條 체결 이래 각 통교자와의 歲遣船 定約, 朝聘應接規定의 완비 등이 이루어진 단계로 통교체제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다.

 제3기는 성종 3년(1472)부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성종대 초기 확립된 통교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三浦倭亂·蛇梁津倭變·乙卯倭變 등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壬申約條·丁未約條등 조약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중반 이후는 중앙정부간의 통교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대마도와의 무역만이 유지되었을 뿐이므로 대일통교의 변천기 내지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이하 이 순서에 따라 대일관계의 전개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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