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2) 대왜구정책과 대마도 정벌
  • (1) 여말 선초의 왜구

(1) 여말 선초의 왜구

 신흥왕조인 조선의 대외적인 급선무는 주변국과의 우호관계 수립이었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대명관계는 물론 남쪽 변경의 안정을 위해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일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왜구였고, 조선 초기의 대일교섭은 다원적인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대일관계의 역사적 추이는 왜구를 어떻게 진압하고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구는 13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일본의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이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일본인의 침략행위’가 되겠지만 13세기부터 일본인들의 침탈 해적행위가 계속됨에 따라 당시부터 조선과 중국에서는 ‘일본인의 해적단’이란 뜻으로 숙어화되어 사용되었다.648)왜구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면서 왜구의 활동과 영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또 여말 선초의 왜구 속에 ‘僞倭’·‘假倭’·‘裝倭’라 불리는 비일본인의 도적집단이 상당수 있었다고 하면서 왜구가 곧 일본인 해적이라는 개념파악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石原道博,≪倭寇≫, 吉川弘文館, 1964 및 田中健夫,≪中世海外交涉史の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59 및≪倭寇-海の歷史-≫, 敎育社, 1982). 그러나 조선인·중국인·포르투갈인이 왜구를 가장하거나 위장한 경우는 예외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구는 그 활동시기와 성격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3∼15세기에 걸쳐 활동한 집단은 전기왜구라고 하는데, 무역외적인 측면이 많았고 침략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이 주된 대상이었다. 본고에서 말하는 왜구는 주로 이것을 가리킨다. 둘째,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말까지, 즉 일본의「應仁의 亂」(1467∼1477)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왜구를 후기왜구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중국 및 동남아시아 연안에서 활동하였고 무역적인 요소가 강해 일본에서는 이들을「武裝商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구의 근거지는 對馬島·壹岐島·松浦로서 요컨대 일본 西國지역의 도서가 중심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총칭하여「三島倭」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지방영주들의 보호와 묵인하에 조직적으로 해적행위를 하였다. 3도왜는 남북조시대에 전란에서 패배한 北九州 武士團과 재지세력인 松浦黨 등 조직무장집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곤궁에 빠진 비조직적 영세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649)田村洋幸,≪中世日朝貿易の硏究≫(三和書房, 1967).

 왜구가 발생할 당시의 일본 국내사정을 살펴보면, 시대적 배경은 鎌倉幕府[가마꾸라 바꾸후]시대 말기와 남북조시대로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중앙정부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구의 활동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몰락한 무사와 영세민이 중심이 된 왜구는 생활필수품을 얻기 위해 해적활동을 하게 되었던 만큼 주로 양곡 약탈과 인민의 노략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편 고려도 원간섭기에 정치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麗元聯合軍의 일본정벌시 군사력 징발 등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하여 국력이 쇠잔하였다. 또 고려말기에 이르면 원·명 교체와 紅巾賊의 침략 등 중국측 사정이 영향을 주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시행되었지만, 그의 사후 정치는 더욱 문란하고 국력은 쇠약해져 갔고 북방의 방비에 치중하다 보니 각 해안에 대한 방비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왜구의 침구가 극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구발생의 경제적인 원인은 원종대 이후 일본에서 오는 進奉船의 제한과 그 후 대마도의 제한조치 위반에 따른 進奉貿易의 완전한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된 것은 충정왕 9년(1350)부터였다. 특히 고려말 우왕대에는 아주 심해서 이성계의 네 가지 요동정벌 불가론 중 세번째로 든 ‘거국적으로 원정을 하면 왜구가 그 허점을 노리게 된다’는 사항은 당시로서는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여튼 이 왜구의 침입은 홍건적과 함께 고려왕조를 몰락케 한 가장 큰 외적 요인이었다. 실제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일본인이 내륙지방까지 침입해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 피해도 커서 한때는 왜구를 피하기 위해 遷都論이 재기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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