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2) 대왜구정책과 대마도 정벌
  • (2) 왜구대책

(2) 왜구대책

 고려말의 대왜구정책은 외교적 교섭과 군사적 대응, 그리고 회유책이었다. 고려정부는 왜구의 금지를 위해 일본측에 전후 8차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교섭은 일본국내 정치정세와 西國領主들의 소극적인 반응으로 실질적인 효과가 별로 없었다. 단지 今川了俊과 大內義弘이 왜구 진압에 약간 노력을 기울이고 피로인을 송환하는 등 성의를 표하는 정도였다. 왜구방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고려는 적극적인 방어대책에 주력하였다. 왜구소탕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우왕 2년(1376) 崔瑩의 鴻山大捷, 우왕 6년 羅世·崔茂宣의 鎭浦戰鬪와 이성계의 荒山大捷, 우왕 9년 鄭地의 南海大捷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군사적 대응이 성공함으로써 왜구의 대규모 침구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정부는 대마도주에게 쌀을 지급하는 등 왜구를 진무하는 방책을 쓰기도 하였지만 본격적인 회유책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조선 초기의 왜구대책은 고려 말기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을 교묘하게 배합해서 대응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왜구 진압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권력을 잡아 조선왕조를 건국한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일본의 상황과 왜구문제에 관해 제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왜구진압대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海防對策의 충실화이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 22년(1373)에 창설된 수군을 보다 정비하고 병선을 개량하였으며, 연해 요처에 성을 쌓고 烽火를 설치하게 하여 침입해 오는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6년(1397)에 이르면 “연해지역에 대한 수군의 방어에 의해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650)≪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2월 갑오.라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가 되었다. 조선초의 수군강화책은 태종대에 이르러서 더욱 진전되어 태종 8년(1408)에는 병선이 613척, 수군병력 5만 5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651)瀨野馬熊,<倭寇と朝鮮の水軍>(≪史學雜誌≫26-1, 1915). 이와 같은 군사적 방비책에 의해 왜구의 침략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둘째 외교적 노력이다. 태조는 즉위초 실정막부의 족리의만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 금지를 요청하고 왜구에게 영향력을 가진 서국지방의 호족들에 대해서도 왜구 진압을 요구하였다. 막부와 서국지역의 호족들은 왜구 진압에 노력하고 피로인의 송환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4년 九州探題 금천요준의 보고에 의하면 옛날 왜구의 10중 8∼9가 감소하였으며, 피로인의 절반이 쇄환되었다고 하였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외교적 교섭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회유책이다. 태조는 왜구 진압과 피로인 송환에 적극적인 호족들에 대해서는 통교상의 특혜를 주고, 조선의 관직을 하사하는 授職制度를 활용하였다. 태조 5년 12월 60여 척의 배와 수백 명의 왜인을 이끌고 와 투항한 왜

 구수렁에게 宣略將軍이라는 직함을 주어 왜구 방지에 주력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수직제도의 시초이다.652)일본의 본거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조선의 관직을 하사한 최초의 사례는 세종 26년(1444) 6월에 보인다. 授職人制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수령급이나 피로인 송환에 적극 호응한 공로자와 항복한 일본인 중에서 왜구의 수령이나 왜구 진압에 공로를 세운 자, 조선술·의술·철공 등의 특기를 가진 자 등에게 조선의 관직을 주어 우대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 여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행해진 것을 일본에게도 적용한 바로서 그 연원은 중국의 外夷羈縻策에서 찾아볼 수 있다.653)中村榮孝,<室町時代の日鮮關係>(≪日鮮關係史の硏究≫上, 吉川弘文館, 1965), 164쪽.
조선정부는 이들에게 관직과 함께 사령장(告身)·관복·품대를 하사하였다. 일본내 거주자는 일년에 한 번씩 하사받은 관복을 입고 사령장을 지참하여 入朝하도록 하였으며 그에 상당하는 접대를 받고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관직은 명예직이었고 전부 武散職이었다. 이는 조선의 변경을 지키는 관원이라는 의미로서 전형적인 외이기미책이며 양자의 관계는 조공관계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수직왜인이라고 불렀는데 성종대 초기에 만들어진≪海東諸國紀≫는 모두 26인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왜구 중에서도 투화한 자에게는 토지·재물·집을 주고 조선에 살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귀순한 일본인을 向化倭 혹은 投化倭·降倭라고 하였는데 해방대책이 성공하면서 향화왜인들이 급증하였다. 태종 9년에는 경상도에 정주하는 향화왜인이 2천 명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너무 많아지자 이들을 각 州郡에 분산시키고 연해가 아닌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하였다.654)≪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1월 임오. 또 태종 11년 3월에는 宣略將軍으로 임명되어 왜구 진압에 활약한 수직왜인 林溫을 대마도에 돌려보내 對馬島倭萬戶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태조의 대일정책의 기본은 南邊의 평화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건국 초기에 대명관계도 안정되지 않았고, 북변의 여진에 대한 경략도 필요했던 만큼 그는 왜구대책 중에서도 외교책과 회유책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정종과 태종에게도 계승되어 태종대에 이르면 왜구는 거의 종식되어 갔다. 조선초기의 성공적인 왜구대책으로 인해 왜구들은 분해되면서 대부분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왜구의 통교자로의 전환형태는 向化倭人·興利倭人·使送倭人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향화왜인은 투항하거나 귀순

 한 왜구들로서 조선에 정주하였고, 흥리왜인은 조선연해에서 독립적으로 상업행위를 하는 일본인이며, 사송왜인(혹은 使送客人)은 장군 이하 서국지역 호족들의 대조선통교의 중개자로 활동하는 자로서 대조선무역에 참여하였다. 한편 왜구의 일부는 여전히 해적행위를 하면서 활동무대를 중국 산동반도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