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2) 대왜구정책과 대마도 정벌
  • (3) 대마도 정벌

(3) 대마도 정벌

 조선 초기의 왜구제어책으로 왜구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연안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왜구들은 땔감과 물을 공급받을 중간기착지가 필요하였고, 약탈물자를 판매하여야 하는 등 조선과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또 이들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조선의 연안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본거지를 對馬·壹岐·松浦의 3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마도를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 朴葳에 의한 토벌이래 태조대에도 대마도 정벌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655)≪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12월 정해.
≪春官志≫권 3, 往征.
잔존한 왜구들에 대한 최후의 군사적 대응이 세종 원년(1419)의 대마도 정벌이었다. 조선에서는「己亥東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應永의 外寇」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조선 초기 조일관계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대마도 정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그 해 5월 대마도인의 침략이었다. 태종 18년(1418) 대마도주 宗貞茂가 죽고 아들 宗貞盛이 어린 나이에 島主가 되자 내분이 일어났다. 이에 행정 통제가 허물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대마도인들은 다시 왜구로 변하여 조선의 연안을 침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세종 원년 5월에 왜선 50여 척을 이끌고 충청도 庇仁縣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노략질을 하고, 이어 황해도 延平島를 재차 침입한 후 요동반도로 진출하였다.

 당시 대일강경책을 취하였던 上王(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출병에 앞서 내린 상왕의 교서에는 국초 이래 조선정부의 후의를 저버리고 충청도와 황해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한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여 우환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가 나타나 있다. 전술적으로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요동을 향한 기회를 이용하여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면 왜구를 근절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6월 19일 조선측은 三軍都體察使 李從茂 이하 병력 17,000여 명을 병선 227척에 싣고 거제도를 출발,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들은 20일 대마도의 淺茅灣을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豆知浦에 정박하였다. 이어 이종무는 島主에게 諭書를 보냈으나 답서가 없자 26일 상륙, 병력을 좌우 양군으로 나누어 각지를 토벌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는 일기도와 上松의 원병과 함께 매복한 대마도군에게 朴實이 이끈 좌군이 패배하여 백수십 인이 전사하였다. 이후 이종무가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려고 하자 당시 대마도의 실권자인 都都熊瓦는656)左衛門太郎 혹은 早田萬戶라고도 하며 당시 島主의 숙부였다. 서계를 올려 군사의 철수와 수호를 간청하다. 서계를 본 이종무는 태풍에 대한 우려도 고려하여 제재를 중단하고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하였다.

 기해동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쌍방간에 3,8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측은 이를 통해 왜구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가하는 한편 많은 피로인을 쇄환하는 전과를 얻었다. 그러나 왜구의 주력부대가 도내에 없었던 만큼 왜구의 섬멸이라는 당초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한 샘이다. 그래서 다시 정벌하자는 논의도 나왔다. 태풍에 대한 우려 등 찬반논의가 조정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7월 12일 김해에서 都督 劉江이 요동에서 돌아오던 왜구를 대파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태종도 다시 정벌하려는 뜻을 거두었다.

 재정벌의 논의가 수그러지면서 조선정부는 7월 17일 병조판서 趙末生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招諭의 서계를 보내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일본 본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였다.657)中村榮孝,<朝鮮世宗己亥の對馬征伐>(앞의 책, 上), 253쪽. 이에 대해 도주는 9월 25일 항복을 청함과 동시에 印信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대마도를 완전히 비우라는 조선정부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후 반년에 걸친 교섭 결과 이듬해 정월 ① 대마도는 조선의 屬州로서 경상도의 관할하에 두며 경상관찰사를 통해 서계를 올릴 것 ② 요청한 印信을 하사하되 ③ 앞으로 대마도로부터 오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등으로 결말지어졌다.658)≪世宗實錄≫권 7, 세종 2년 윤 정월 임진. 이로써 대마도주는 受圖書人이 되었고 도주에 의한 서계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문제는 조일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선정부와 실정막부간에 일시적 긴장상태를 초래하였다. 대마도 정벌의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에서는 조선과 명이 연합하여 일본을 침공한다는 유언이 나도는 등 긴장하였고, 조선측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하였다. 대마도와의 사이에 전후처리 교섭이 진행되던 세종 원년(1419) 11월 막부장군 足利義持가 보낸 使僧 梁倪와 구주탐제의 사절이 조정에 도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大藏經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대마도 정벌의 진상과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려는 목적에서 파견된 사절이었다. 이에 세종은 막부가 요청한 7천 軸의 대장경을 回賜함과 동시에 宋希璟을 回禮使로 보냈다. 송희경은 막부장군에게 대마도 정벌이 왜구 금압을 위한 것이었을 뿐 일본 본토를 침략할 의도가 아니였음을 밝히고, 긴장의 핵심이었던 대마도의 경상도 예속문제도 세종이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원점으로 회귀하였다.

 기해동정의 의의는 왜구의 근절과 함께 통교체제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이 전투로써 대마도의 왜구를 완전 토벌하지는 못했지만 왜구의 본거지이자 경유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행사의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왜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己亥東征 이후 왜구가 복속하였다”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고659)≪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4월 신사. 실제 왜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옴으로써 세종대의 각종 통교제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는 왜구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고, 조선과 일본간에「兩屬關係」로서 일종의 중립화정책을 취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는 조일교역간에 중계보급기지로서 무역이익을 취하면서 양국외교의 안전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