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4) 대일관계의 변천
  • (1) 삼포왜란과 임신약조

(1) 삼포왜란과 임신약조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의 직접적인 요인은 성종대 이래의 엄격한 교역통제책과 연산군대 운영상의 모순에 대한 일본인 특히 대마도인들의 불만이었다. 즉 연산군의 실정에 의해 조선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통교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해졌고, 이와 함께 변방을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빈발하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연산군대에 이미 왜선의 해적행위와 3포 恒居倭人에 의한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681)≪燕山君日記≫권 36, 연산군 6년 정월 기묘. 중종 원년 정부는 통교와 접대를 계해약조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상태 악화와 접대비용 과다로 인해 4년 후에는 다시 긴축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측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통교왜인들의 저항도 거세게 일어나 성종 5년(1474)에서 중종 4년(1509) 사이에 왜구에 의한 약탈사건이 12회나 발생하였다.682)≪續武定寶鑑≫권 4, 중종 5년 4월 기미. 조정에서는 왜인들의 법규위반과 침략행위를 규제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미봉책으로 대응하였다. 이와 같이 삼포왜란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정부의 대일정책이 일관성과 엄격성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왜구 금지를 위해 통교자들에게 하사품을 후하게 주다가 긴축과 통제정책을 실시한 것이 일본측 통교자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일단 약조를 맺었으면 규정대로 엄격하게 실시해야 했는데, 왜구 재발에 대한 의구심과 上國으로서의 대의명분과 관용 등이 혼합되어 기해동정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미봉책과 회유책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이 통교왜인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삼포왜란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부수적인 요인으로는 3포 항거왜인들의 기동성과 무력을 겸비한 조직을 들 수 있다.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실태를 보면, 태종 7년(1407) 포소를 개항하여 항거왜인의 거주를 허락한 이래 세종대 초기에는 3포 항거왜인을 모두 60호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항거왜인의 숫자는 이후에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세조·성종대에는 400호를 넘었다. 조선정부는 주기적으로 송환을 하였으나 줄지 않고 계속 불어나자 결국「倭里」라는 거주지역을 설정하여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3포의 항거왜인은 각 포소마다 추장이 있고 그 위에 受職人인「三浦總治者」가 총책임자로 통제하는 행정적인 조직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정부로부터는 면세의 혜택을 받는 대신 이 조직을 통해 세금을 징수해 대마도로 보내는 등 대마도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결국 삼포왜란을 일으켰는데, 거기에는 대마도의 조종과 3포 항거왜인들의 조직력과 기동성이 발휘되었다.

 중종 5년 4월 4일 薺浦 恒居倭酋와 대마도의 代官 宗盛親이 중심이 되어 대마도주의 전면적인 지원하에 군사 4, 5천 명이 거제도의 수군근거지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熊川城을 포위하여 분탕질을 함과 동시에 부산포와 염포에서도 항거왜인들이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선정부에서는 곧 5천여 명의 진압군을 보내어 대응하였다. 이에 왜인들은 부산첨사 李友曾을 살해한 뒤 각 포의 선박을 모두 불태우고 철수하는 한편 대마도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和好를 요청하였다. 삼포왜란은 15일만에 진압되었지만 전투 결과 조선측 피살자 272명, 민가 800여 호가 불탔으며, 왜인측은 선박 5척과 300여 명이 참살되었다.

 삼포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즉시 대마도와의 통교를 중단시켰다. 난이 진압된 지 1년 후 막부측에서 국왕사 弸中을 파견하여 강화안을 제시하며 대마도와의 통교재개를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일통교 단절이라는 강경론도 나왔으나 결국 조건부로 화의 제의에 응하였다. 한편 붕중을 매개로 한 강화교섭 중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斬首來獻, 피로인 송환 등 조선측의 요구조건을 이행하자 조선정부는 왜란 2년 후인 중종 7년(1512)에 壬申約條을 체결하여 교역의 재개를 허락하였다.

 임신약조의 내용은 ① 3포에서의 왜인 거주 불허 ② 대마도주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 ③ 도주 歲賜米豆를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 ④ 島主 特送船制의 폐지 ⑤ 도주일족과 수직·수도서인의 세견선·세사미두 폐지 ⑥ 도주파견 이외의 사송선은 敵倭로 간주 처단 ⑦ 일본 본토의 일본인 중 수직·수도서인 정리 ⑧ 포소와 海路의 제한 ⑨ 국왕사를 제외한 상경왜인의 무기휴대 금지 등 9개 조로 되어 있다.

 왜란 전에 비해 대폭적인 제한을 가한 것으로 경제적인 요소와 질서유지라는 측면에서 조선측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조약의 실시에 의해 조선측의 접대비용이 경감되고 왜인들의 무역 이익이 감소되었지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삼포왜란은 계해약조 이후 지속되었던 조선 초기 이래의 대일통교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조선정부는 일본 및 대마도와의 역사적·지리적 관계에 대한 고려와 북방야인들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 때문에 통교단절은 하지 않았지만 삼포왜란은 조선 초기의 대일통교질서가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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