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5) 경제적 교류
  • (3) 교역물품과 대일무역의 성격

(3) 교역물품과 대일무역의 성격

 일본산 물품으로서는 금·은·동·유황·납 등의 광산물, 칼(太刃·環刀)·부채·병풍 등의 공예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외에 동남아시아 제국이나 南蠻産 등「남방물산」이 크게 환영을 받았는데, 蘇木(丹木)·朱紅 등 염료, 胡椒·甘草·樟腦·龍腦·藿香 등 약재, 沈香·白檀 등 향료, 물소뿔·무기·상아·공작·앵무새 등 군기품 내지 장식품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구리·유황·소목·호초 등이 중요 물품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구리는 놋그룻·무기·화폐·활자 등의 제조에 소요되었던 만큼 수입품의 근간을 이루었고, 유황도 약재와 화약재로서 필요하였다. 소목은 심홍색의 고급염료로서 종묘의 채색과 관복의 염색에 필요하였으며, 호초도 약재 내지 조미료로서 귀족들의 수요가 높았다.

 수입품 중에는 광산물과 소목·약재 등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제품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향료 등 사치품이나 기호품이 많았다. 남방물산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물품들이 귀족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국민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진상품목 중 사치품 등은 가져오지 말라고 권유한 기사가 가끔 나타나며, 교역축소 논의가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수출품으로서는 正布(麻布)·苧布(白苧布·黑苧布)·綿布·綿紬(靑木綿·紅紬·內紅紬)·의복 등 섬유제품, 花紋席·호랑이가죽·표범가죽 등 장식품, 인삼·꿀·오미자 등 약재, 대장경·서적·문방구 등 문화제품 등이 있었다. 수출품이라기보다는 回賜의 형식으로 지급되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에서 수출된 품목을 보면 약재와 문화제품 등 귀족취향의 물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인들의 의식생활에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마포·명주·목면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제품과 쌀·콩 등 곡물이었다. 각종 섬유제품 중에서도 특히 목면은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는 일본인들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리하여 계해약조 이후에는 목면이 조선측의 주된 대일수출품이 되었고, 일본인들의 요구에 따라 公木이란 이름으로 화폐적인 기능도 하였다.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매년 수만 필에서 수십만 필의 목면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성종 17년(1486)에는 한 해 유출된 목면량이 50만 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으로 수출된 조선목면은 일본인의 의생활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어질 정도로 중시되었다.688)田中健夫,<中世東アジアにおける國際認識の形成>(앞의 책, 1982), 187쪽. 한편 식량이 부족한 지역에 대해서는 쌀과 콩도 지급되었다. 왜구침입의 주된 요인 중의 하나가 식량조달이었던 만큼 교역왜인들의 米豆지급 요청에 조선정부는 응해주었다. 그러나 재정부담이 늘어나고 쌀이 부족해지자 세종대 중기 이후에는 대마도·일기도에만 歲賜米豆의 형식으로 하사되었다.

 조일무역의 일본측 담당자는 동남아 교통로를 장악하고 일본 국내시장과의 연계가 유리한 博多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동남아-琉球-薩摩-博多-대마도-조선의 루트가 남방무역의 주요 통로였다.689)田中健夫,≪倭寇と勘合貿易≫(至文堂, 1961), 173쪽. 박다상인들이 일본·명·조선·유구를 연결하는 국제적 무역상이라면 대마도는 기생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대마도 중시책으로 점차 대마도 상인들이 대조선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圖書의 대부분을 대마도인이 가지게 되었고, 대조선 무역선 총수의 4분의 1 이상을 대마도주 종씨일족이 차지하게 되었다.690)田中健夫,<中世日鮮交通における貿易權の推移)(앞의 책, 1959), 196쪽.

 조선 전기의 대일교역은 쌍무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요청에 의해 전개되었다. 일본측 통교자들은 사행의 명목에 관계없이 모두 교역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반해서 조선측은 순수한 사절이나 禁寇政策의 목적하에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부수적으로 교역을 하였다. 대일통교의 기본목적이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왜구금지와 정치적 복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역면에서 보면 조선은 수동적·소극적이었고 일본측은 능동적·적극적이었다.

 조일무역에서 경제적 상호보완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교역에 대한 양국의 관심과 비중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경제적 교류는 양국간의 통교관계에 있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특히 광산물과 염료 등에 대한 조선측의 수요가 있었고 남방물산이 귀족층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은≪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전혀 경제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일방적인 교역 내지 교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성격을 보면 부등가무역이었고 증여무역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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