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6) 사절의 왕래와 문물교류
  • (1) 사절의 왕래

가. 조선측의 사절

 조선 전기 일본에 파견한 사행의 횟수는 막부장군과 여러 호족, 대마도주 등에 대한 사절을 모두 포함하여 총 65회에 달한다. 이를 파견대상별로 구분해 보면 室町幕府 將軍 20회·九州探題 2회·大內殿 2회·對馬島主 32회·壹岐島主 4회·미상 5회이다. 이 가운데는 중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앙정부의 대표인 막부장군보다 대마도주를 비롯한 지방호족들에게 파견한 사절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대일외교가 막부장군과일원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 등과도 통교하는 다원적인 체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사절 파견양태를≪조선왕조실록≫에 의하여 왕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 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합계
재위연수 7 2 18 32 2 3 14 1 25 12 39 1 22 25 201
사절횟수 7 2 24 15 2 4 6 1 2 1 1 65

*세조대와 중종대는 즉위년이 곧 원년으로 재위연수가 1년씩 많음.

 65회 가운데 국초부터 세종대까지 48회의 사절이 파견되어 조선 초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태종대가 재위연수 18년에 24회의 사행이, 세종대가 32년간에 15회의 사절 파견이 이루어져 이 시기 왜구를 금지시키고 통교체제를 정비하려는 조선의 적극적인 외교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왜구가 진압되고 통교체제가 확립된 후로는 조선은 사절 파견에 아주 소극적이었다. 조선정부는 계해약조가 체결된 세종 25년(1443) 이후로 막부장군과 대마도주 외에는 일체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일본은 시종 활발하게 사절을 보냈다. 접근동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16세기 이후로 조일간 통교가 상업적 성격으로 바뀌면서 조선은 통제적이었던 반면 일본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65회라는 사절의 횟수는 조선에 온 일본인 사행의 숫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다. 또 일본측 통교자들은 사행과 교역이라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측 사절의 경우 외교적인 임무만을 수행하였다. 국왕사의 경우 使命이 전부 정치적인 것이었고 대의명분에 충실하고자 했던 만큼 사행시의 식량과 경비를 모두 가지고 갔다. 또 조선은 일찍부터 사행시 사적인 교역을 엄금하였으며 세종 21년에는<私貿易禁止事目>이 입법화되었다. 이 점은 사명을 가리지 않고 교역을 하면서 사행경비도 조선측에 부담을 지웠던 일본사절과는 대조적이다. 또 조선의 경우 모든 사행이 정부에서 파견한 국가사절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 개인자격으로 파견된 사절은 전혀 없다. 이 점에서도 국왕사 외에 거추사·제추사 등 다양한 통교자로 구성된 일본측과 대비된다.

 사절의 파견목적은 왜구금지 교섭과 수호관계 수립 권유, 왜구금압과 피로인 송환에 대한 치사, 일본국왕사에 대한 報聘, 막부장군과 대마도주의 襲職축하와 弔慰, 각종 조약의 체결과 규정엄수 요구, 규약위반에 대한 책망과 범죄단속 요구, 일본국정과 왜구정황에 대한 탐색 등 다양하였다.

 대일사행의 종류도 다양하였다. 국왕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명칭이 通信使·通信官·回禮使·回禮官·報聘使 등으로 조선 후기의 통신사만큼 정례화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행의 형식은 국왕의 명의로 실정막부 장군에게 보내는 사절과 구주탐제와 대호족, 대마도주 등에게 파송하는 예조명의의 사절로 나뉘어진다. 횟수로는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사절이 32회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였다. 특히 대마도와 일기도에 보낸 사절의 명칭을 보면 敬差官·垂問使·體察使·招撫官 등 국내의 지방에 파견하는 官名과 같아 이들 지역을 속국시 내지 附傭國視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행의 구성은 국왕사의 경우, 성종 10년(1479) 통신사를 파견하고자 했을 때 만든<日本國通信使事目>을 보면 正使·副使·書狀官 각 1인, 通事 3인, 押物 2인, 醫員 1인, 領船 2인, 伴倘 5인, 樂工 3인, 指路倭 2∼3인, 船匠 2인, 冶匠 2인, 火筒匠 2인, 吹螺匠 2,인, 軍官 약간 명, 螺匠 4인, 執饍官奴 2인, 船上慣熟 55인 등 90 내지 10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691)≪成宗實錄≫권 100, 성종 10년 정월 정축. 국왕사의 대표적인 정사는 정3품에서 종4품 품계 사이의 전직자 가운데서 선발되었다.

 사행로정을 보면 국왕사의 경우, 이상의 인원이 大船 두 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일기도-博多-赤間關-尾路關-兵庫-大阪을 거쳐 京都에 도착, 실정막부의 장군에게 국서를 전달하였다. 수로와 육로를 교대로 가는 험한 노정으로 왕복기간은 대개 9개월 내지 10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사절파견 양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이 있다. 통신사의 경우 성종대까지 파견을 시도한 경우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막부장군을 접견하여 국서를 전달하는 직능을 완수한 사행은 세종 25년 卞孝文 일행이 마지막이었다. 임란 직전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청에 의하여 파견된 통신사 黃允吉 일행을 성격상 예외로 친다면 조선 전기에 있어 실정막부에 파견된 사절은 세종대까지만 있었던 셈이다. 통신사 파견이 마지막으로 시도되었던 것은 성종 10년이었다. 그러나 이 사행은 대마도 체재 중 내란이 일어나 시간을 보내다가 정사 李亨元이 중병에 걸려 사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692)조선 전기 실정막부 장군 앞으로 파견한 사행은 20회였지만 京都까지 가서 使命을 완수한 것은 11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15세기 후반 통신사 파견이 중단된 이유는 ① 통신사행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점 ② 실정막부가 약체화하여 막부장군이「일본국왕」으로서의 외교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 ③ 통교체제 확립에 의해 통제책이 나름대로 잘 기능하고 南邊의 안전이라는 외교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실정막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데 열심이었다. 8대 장군 足利義政[아시까가 요시마사]대(1449∼1473)에는 17회의 일본국왕사 파견이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정부와의 교섭이 막부의 권위유지에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막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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