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6) 사절의 왕래와 문물교류
  • (2) 문물의 교류

(2) 문물의 교류

 양국간 사절의 활발한 왕래는 자연히 문물교류의 통로가 되었다. 문물교류면에서는 역시 수입보다는 수출이 많은데, 일본에 전수된 문물의 대표적인 것이≪高麗大藏經≫을 비롯한 佛書·梵鐘·佛具 등 불교문화재였다. 그 밖에 일부 유교서적과 문집류 등도 요청에 의해 증여되었다.695)李鉉淙, 앞의 책, 320∼324쪽. 예를 들면 세조대에는 대마도주와 京都의 거추사의 요청에 따라 懶翁和尙의 영정·불상·불구와 함께≪論語≫·≪三體詩≫·四書五經이 기증되었으며,696)≪世祖實錄≫권 17, 세조 5년 8월 임신·권 32, 세조 10년 정월 임술 및 권 41, 세조 13년 정월 을해. 성종대에는 일본국왕사의 요청에 의해≪논어≫·≪孟子≫·≪得效方≫·≪東坡≫·≪杜詩≫·≪黃山谷≫·≪詩學大成≫등의 유교서적과 시집이 賜給되었다.697)≪成宗實錄≫권 231, 성종 20년 8월 신해.
이러한 문물전파의 영향때문인지 대마도의 어린이들이 학습차 조선에 유학오는 사례도 있었다(≪世宗實錄≫권 40, 세종 10년 6월 갑신 및 권 85, 세종 21년 4월 갑진).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장경의 증여이다.≪고려대장경≫은 佛典을 총 망라한 가장 우수한 불경으로 유명하며 당시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일본측에서 대장경을 요청한 것은 고려말부터이다. 즉 우왕 14년(1388) 日本國使 妙葩와 창왕 원년(1389) 구주탐제 今川了俊이 요청한 것을 비롯하여 공민왕대에는 실정막부에서도 요청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측은 대장경 요청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조선 초기 일본국왕사가 올 적에는 거의 예외없이 대장경을 요청하였다. 세종 원년(1419)에는 막부에서 한번에 7천축의 대장경을 요청하였고, 심지어는 대장경의 원판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세종 25년의 통신사행에 대한 회례사를 막부에서는「請經使」라고 할 정도로 대장경 요청에 적극적이었다. 막부뿐만 아니라 호족들과 대마도주 등도 앞다투어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대장경의 하사를 요청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일본측 대장경 요구기사를 보면, 150여 년간에 걸쳐 총82회의 요청이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태조대에서부터 중종 34년(1539)까지 일본국왕사가 29회, 호족 등 제추사가 53회 요청하였다.698)羅鍾宇,<朝鮮前期 韓日文化交流에 대한 硏究-高麗大藏經의 日本傳授를 중심으로->(≪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1989), 327쪽. 시기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와 세조대가 많았다. 태종대까지 26년간 27회의 요청이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세조·성종대로서 19회에 달하였다. 세조는 특히 대장경 요청에 잘 응해 주어 일본에서는 ‘佛心의 天子’로 불리우기도 하였다.699)中村榮孝,<室町時代の日鮮關係>(앞의 책, 上), 181∼182쪽.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초기에는 대장경 사급 요청을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일본측의 요구가 지나치고 대장경의 운반에 비용도 적지 않게 들자 선별적으로 하사하였다. 82회의 요청 가운데 조선측에서 요구를 들어준 것은 일본국왕사가 22회이고, 제추사는 24회였다. 일본국왕사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 주었지만 제추사의 경우 절반 이상은 거절한 셈이다.

 일본에서 이렇게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장경을 요청한 이유는 일본 불교계의 문화적 욕구와 정치적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불교는 室町時代에 들어와 산간불교에서 민간불교로 변하여 많은 사찰들이 새롭게 건립되었고, 또 내란 중에 소실된 사찰을 재건하는 일이 많았다. 이 경우 그들은 새로운 사찰에 대장경이나 고려범종을 비치하고자 하였다.≪고려대장경≫에 대한 선망이라는 문화적 욕구 외에도≪고려대장경≫은 막부나 호족들의 권위확립에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 승려들이 막부의 외교문서를 기초하고 외교사절로서 활약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조선 전기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문화재는 당시 발전도상에 있었던 일본 불교계의 동향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어진다.700)田中健夫,<中世東アジアにおける國際認識の形成>(앞의 책, 1982), 188쪽.

 그 밖에 사행원들이 일본에서 구입해 온 서적류로는≪經史類題≫20권,≪百編尙書≫·≪詩人玉屑≫등과 일본지도가 있었다.701)≪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2월 임신·권 80, 세종 20년 2월 계유 및 권 41, 세종 10년 7월 신해. 또 이들 사행원들을 통해 동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와 중국물화가 일본내에서 유통되는 사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사행무역을 통해 일본 물품 및 동남아 물품도 진상품으로 들어오게 되는 등 동남아 제국과의 문물교류의 한 통로가 되었다.

 기술면에서도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였다. 조선측에서는 사절파견시 기술자와 각종 재능인을 동행시켜 기술교류를 시도하였다. 즉 통신사의 일행 중에는 船匠·冶匠·火筒匠·吹螺匠 등 기술자와 재능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일행에 참여시킨 목적이 기술도입을 위한 것인지 전파를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들을 중심으로 기술교류가 있었던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702)조정에서 우수한 기술자를 파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논의가 있었던 사실을 보면 기술 과시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成宗實錄≫권 101, 성종 10년 10월 계축). 일본으로부터도 鐵工·吹鍊銅鐵者·石硫匠·黃採者·船匠·鐵匠 등의 기술자가 사행원과 같이 왔다. 또 향화왜인들 가운데도 기술자가 적지 않게 있었다.703)≪世宗實錄≫권 1, 세종 원년 8월 신묘 및 권 84, 세종 21년 2월 을사.
≪明宗實錄≫권 25, 명종 14년 6월 갑자.
이들이 조선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관련된 기술이 이들을 통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사행원들을 통해서도 일본의 기술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水車利用法·造船法·造劍法·倭紙造作法·炒鐵法 등이다.704)李鉉淙, 앞의 책, 325∼329쪽. 태종·세종대 대일교섭의 실무자로서 활약한 李藝는 일본의 火砲·兵船 및 倭水車의 장단점을 조선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우수한 요소를 적극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통신사 朴瑞生도 사행 후 復命에서 일본의 시장 발달상과 화폐유통의 편리성을 소개하면서 당시 부진하였던 조선의 상업, 광공업의 후진성을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705)≪世宗實錄≫권 46, 세종 11년 12월 을해. 세종 18년에는 통사 尹仁甫·尹仁紹가 救慌對策으로서 일본인들의 葛根採食法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술과 제도의 도입건의는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소개에 머물고 채용 발전시킨 바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706)李鉉淙, 앞의 책, 329쪽.
李光麟,≪李朝水利史硏究≫(韓國硏究院, 1961), 92쪽.
姜萬吉,<朝鮮前期 工匠考>(≪史學硏究≫12, 1961),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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