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7) 상호인식
  • (2) 일본측의 조선인식

(2) 일본측의 조선인식

 이 시기 일본인의 조선인식을 보면 전통적인 조선관을 계승하는 측면과 새로운 변화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또 朝廷·公家와 武家幕府, 서국지역의 호족과 상인 간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징으로서는 우선 일본지배층의 국제인식의 빈약성을 들 수 있다. 이 점 특히 조정과 공가 등 귀족지배층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842년 통일신라와의 국교 단절과 894년 遣唐使 파견 중지에 의해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14세기말까지 쇄국상태를 계속하였다. 당연히 폐쇄적 국제인식 속에 외국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결핍되었다.711)이 시기 일본인의 국제인식은 ‘島嶼孤立型’으로도 분류되고, 특징은 ‘정보에의 대응이 대체로 수동적이고 판단은 부정확하며 독선적·자의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된다(田中健夫,<中世東アジアにおける國際認識の形成>, 앞의 책, 1982, 182쪽). 이 시기 일본은 神國思想에 바탕을 둔 일본형 小中華意識을 강화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神功王后의 三韓征伐」이라는 설화에 연유한≪日本書紀≫이래의 대조선우월관념을 침전시켜 갔다.

 빈약한 국제인식에서 파생되는 특성은 해외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공포심으로 표출되었다.712)田中健夫,<中世日本人の高麗·朝鮮觀>(위의 책), 334∼336쪽. 구체적인 보기를 한두 개 들어 보자.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정벌에 대한 소식이 2개월 뒤에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그 내용은 “몽고·고려가 연합하여 병선 500여 척으로 대마도에 밀어닥쳤다”라는 것이었다.713)≪看聞御記≫8월 13일 畏言 上. 그런데 몽고와 고려는 당시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이며, 병선수도 과장되어 있다. 이미 망하고 없어진 고려와 원에 대한 공포심, 국제정세에 대한 당시 귀족층의 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또 세종 25년 통신사 卞孝文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접대역을 맡았던 中原康富의 경우 이들을 고려의 사절로 오인하였고, 심지어는 고려를 고구려로 착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때 조정에서의 논의는 당연히 조선은 三韓 이래의 조공국이라는 조선멸시관도 표출되어 있었다.714)三宅英利,≪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관≫(河宇鳳 譯, 풀빛, 1990), 50쪽. 당시 외교실무 담당자와 조정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외교자문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었다.

 이상과 같이 중세 일본인의 대조선인식은 무관심과 공포심에 바탕을 둔 무지와 독선적 이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보기가 豊臣秀吉의 국제인식과 조선관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국제인식의 빈약성이 빚은 처절한 실패의 교훈이기도 하다.

 조정과 공가들에 비해 실정막부를 비롯한 武家들은 상대적으로 해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교섭에도 적극적이었다. 足利義滿은 새롭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진하여 명 중심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수호할 것을 요청하는 등 적극외교를 전개하였다. 그 후 足利義持가 대의명분론과 공가들의 압력에 의해 일시 책봉체제를 거부하고 조선에 보내는 서계에 일본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막부의 외교권의 박약성과 대외인식상의 갈등이 드러난 사례이다. 그러나 실정막부 후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이익과 대장경 수입을 위해 조선에 대해 저자세외교를 하였으며 서계에 조선상국관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과 현실감각이 뛰어난 집단은 서국지역의 호족과 상인들이었다. 이들이 대조선통교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풍부한 지식은 중앙정부와 지배계층의 인식으로 정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정막부 시대의 대외관계에 대한 사료는 매우 빈약하다.≪善隣國寶記≫를 제외하고는 공가와 승려들의 일기 정도가 있을 뿐으로≪조선왕조실록≫이나≪해동제국기≫에 비하면 사료적 가치와 수준이 낮은 편이다.

<河宇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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