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1) 통교관계의 성립
  • (2) 대유구 통교의 기원

(2) 대유구 통교의 기원

 유구에서 우리 나라에 처음 사절을 파견한 것은 고려말이었다.≪高麗史≫에 의하면 창왕 원년(1389) 8월 유구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 玉之를 보내어 表文과 예물을 진헌하였다고 한다. 찰도는 표문에서 스스로 신하로 칭하였고, 왜구에게 붙잡혀 간 被擄人을 송환하는 동시에 유황 300근, 호초 300근, 蘇木 60근, 甲具 20부 등의 물품을 바쳤다. 피로인의 송환과 남방물산의 진헌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이후 우리 나라와 유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두 가지는 고려로서 필요한 바였고, 동시에 유구의 대고려 통교에 필요한 명분과 실리의 양면이기도 했다.

 유구가 고려에 통교를 요청한 목적은 기본적으로 무역의 이익을 얻으려는데 있었다. 유구는 1372년 명에 입공한 이래 남방물산을 구입해 중국에 팔고 또 중국물산을 일본과 동남아제국에 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있었던 만큼, 고려에 대해서도 같은 동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유구가 사신을 보낸 것은 무역상의 동기 외에 정치·군사적인 원인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즉 이 해 2월 慶尙都元帥 朴葳가 병선 2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소식이 유구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당시 유구는 왜구들에게 잡힌 고려인 포로들이 轉賣되어 모이는 곳이었던 만큼 고려의 대마도정벌 소식은 유구에게도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유구는 고려를 강국으로 재인식하게 되었으며 국교의 성립과 관계개선을 위해 사신을 보냈다고 여겨진다.717)≪高麗史≫권 137, 列傳 50, 辛禑.

 처음으로 유구의 사신을 맞이한 고려에서는 의구심을 품었고, 접대문제를 둘러싸고 都堂會議에서 많은 논란을 벌였다. 일부에서는 접대거부안이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멀리서 온 사신을 박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명분론과 피로인을 송환해준 데 대한 답례로 후하게 접대하였고, 유구사신일행의 귀환길에는 典客令 金允厚·副令 金仁用을 답례로 보내었다. 이 報聘使 일행은 유구까지 가서 피로인 37명을 송환해 왔는데, 이 때 유구는 다시 옥지를 고려까지 함께 동행케 하였다. 이렇게 우호적으로 시작된 고려와 유구의 통교관계는 조선왕조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