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2) 대유구관계의 전개
  • (2) 위사의 성행과 조유 관계의 추이

(2) 위사의 성행과 조유 관계의 추이

 조선 전기 유구관계에서 가짜사절의 문제는 朝琉通交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세종대부터 시작되는 일본세력의 방해와 간섭에 이은 대리사절, 나아가 僞使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이야말로 조유관계의 변천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 총 48회의 유구사절 가운데 위사 및 위사의 의혹이 있는 경우가 20여 회에 달하며 위사가 가장 성행한 시기는 성종대였다.718)위사의 양태와 성격에 대해서는 河宇鳳,<朝鮮前期의 對琉球關係>(≪國史館論叢≫59, 1994) 참조.

 그러면 이렇게 위사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체적인 배경으로서는 유구사정에 대한 조선정부의 무지와 조유통교에 대한 일본세력의 방해를 들 수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유구사절에 대한 후대와 조선정부의 미온적 대책 때문이었다.719)≪成宗實錄≫권 279, 성종 24년 6월 기축 및 권 288, 성종 25년 3월 신해.

 위사의 성행은 조유통교체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전단계에서 이미 일본인들의 방해에 의해 조유직접통교의 마비상태가 지속되었고, 유구의 尙眞시대에 와서는 대조선통교의 의욕도 감퇴되었다. 조선측으로서도 위사의 만연상이 판명되자 유구사절에 대해 보다 엄격히 통제하게 되었다. 결국 위사는 파행적이었던 조유관계를 일층 악화시키고 결국 해로를 통한 직접통교와 교역을 단절시키기에 이르렀다.

 중종 19년(1524) 이후에는 위사에 의한 통교마저 단절되었다. 유구와의 사신왕래를 통한 직접적인 통교는 중종 19년 유구국사 等悶意의 내빙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그 후에는 명을 통한 간접통교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즉 조선과 유구의 사절들은 북경의 會同館에서 만나 표류민 송환 등 양국의 현안을 처리하였다. 북경에서의 회동은 비록 장소가 제3국이었지만 양국 사신이 직접 만나 교류하였다는 점에서 위사에 의한 통교보다는 오히려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교역적인 측면이 없어지는 대신 현안의 해결과 일본에 대한정보교환 등 외교의 본질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이상 사절왕래를 중심으로 한 조선과 유구간의 통교사는 통교주체와 사행형태면을 기준으로 대체로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태조대에서 세종 12년(1430)까지로 직접통교시기, 제2기는 세종 13년부터 세조대까지로 일본인에 의한 통교중계시기, 제3기는 성종대부터 중종대까지로 위사의 시기, 제4기는 명종 원년(1546) 이후의 명을 통한 간접통교시기이다.720)이러한 구분은 대체적인 경향을 나타내기 위한 편의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중간에 예외적인 사례도 있다. 예컨대 제3기 위사의 시기 안에서도 연산군 6년의 梁廣 일행은 확실한 유구국왕사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