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2) 대유구관계의 전개
  • (3) 조유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

(3) 조유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

 조유통교체제의 성격을 알기 위해 유구사절에 대한 접대형식과 유구의 국서양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유구사신은 태조 원년(1392) 8월 중산왕 찰도가 보낸 사례가 최초이다. 이 때 찰도는 고려말과 마찬가지로 신하로 자칭하면서 국서를 올렸다. 이 해 9월 유구국사가 여진의 사신과 함께 조회에 참여하였는데, 유구사신을東班 5품하에, 여진사신을 西班 4품하에 배열하도록 하였다.721)≪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기축. 즉 유구국사가 稱臣奉表하자 조선은 조공사절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면서 여진보다 더 하위의 반열에 서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우가 점차 향상되었다. 유구국사에 대한 접대방식이 격식화되는 것은 세종대에 들어서였다. 유구가 명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고 유구 내의 三山時代가 통일된 후 보낸 세종 13년의 유구국왕사에 대한 접대부터 그 형식이 달라졌다.

 세종 13년(1431) 11월 유구국왕사 夏禮久 일행이 와서 東平館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 접대방식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敵禮國의 사신인 만큼 일본국왕사와 마찬가지로 행례하도록 결정되었고, 이에 유구국사는 서반 3품의 반열에 서서 세종을 배알하였다. 이 때부터 유구를 명의 책봉을 받은 적례국으로서 여진이나 일본의 巨酋使 이하의 사절보다는 격을 높여 일본국왕사와 동격으로 인정한 것이다. 유구국왕에 대한 회답서계의 형식도 바뀌었다. 이 때 조선의 회답서계는≪세종실록≫과 유구의≪역대보안≫에 같이 나오는데 그 형식을 보면, 교린국으로서 일본 室町幕府의 장군에 보낸 그것과 동일하였다. 세종 13년의 접대형식은 그 후의 전례가 되었다. 단종 원년(1453) 유구국왕사 道安이 왔을 때도 夏禮久의 전례를 따르도록 하였고, 그 전해에 온 일본국왕사의 접대형식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722)≪端宗實錄≫권 4, 단종 원년 3월 무진.

 ≪經國大典≫에도 유구국왕사에 대해서는 일본국왕사와 같은 대우로서 3품朝官을 보내어 迎送하도록 하였고,723)≪經國大典≫권 3, 禮典, 待使客. 유구국사절이 귀국할 때 해상에서 필요한 過海糧의 지급량도 일본국왕사와 동등하게 하도록 규정되었다.

 한편 유구국의 국서를 보면 그 격식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시기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변화양상을 살펴보면, 태조 원년 중산왕 찰도가 보낸 서계는「表」, 태조 3년과 정종 2년(1400) 찰도와 왕세자 무녕이 보낸 서계는「箋」이었다. 태종 9년(1409) 중산왕 思紹가 보낸 서계부터「咨文」으로 바뀌어 이후 세조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성종 2년(1471)부터 중종대까지는「書契」로 바뀌어졌다.724)국서양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高橋公明,<外交文書, ‘書’ ‘咨’について>(≪年報中世史硏究≫7, 1982) 참조.

 表→箋→咨文→書契로 바꾸어지는 유구의 국서양식의 변화를 볼 때 유구의 대조선통교의 성격이 처음 조공국의 자세에서 점차 향상되어 성종대부터는 대등국간의 통교로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의 대유구 통교의 체제화와 시기적으로 조응하며 조선정부의 책봉체제에 대한 경직화 경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상 조유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건국초기에는 유구를 羈縻交隣의 상대국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종 13년 이후에는 유구를 책봉관계를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외교질서 속에서 敵禮交隣의 상대국으로서 인정하였다. 즉 사대교린이라는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의 테두리 속에 유구를 편입시켰던 것이다. 한편 조유통교체제는 중앙정부간의 교섭이 중심이었다. 이 점은 일본과의 통교체제가 다원적이고 중층성을 띠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유구의 국내정치적 상황과 일본세력의 개입에 의해 성종대 이후「통교체제의 일원성」이 철저하게 관철되지는 못하고 파행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유구에 대한 정책은 한마디로 ‘소극적이지만 거부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은 유구와 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외교자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는 데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로부터 피로인의 송환, 남방물산의 수입, 해외정보의 수집이라는 이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에 대한 견제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에 있어서 남방의 안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외교목표였다. 대일정책의 기본이 왜구의 평화적 통교자로의 전환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해양국가인 유구에 대해서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 점은 유구사신에 대해 이례적으로 호의적인 접대를 한 데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통교자들에 대해서는 통교억제책을 강화해 갔지만 유구국왕사에 대해서는 그런 통제책을 거의 쓰지 않았고, 그 국세에 비해 일본국왕사와 동등한 대우를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우호정책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