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4) 피로인과 표류민의 송환
  • (1) 피로인 송환

(1) 피로인 송환

 고려말 이래 조선 초기 유구의 사절들은 내빙시 거의 공통적으로 남방물산을 진헌함과 동시에 피로인을 송환해 왔다. 특히 피로인 송환은 조선에서 대단한 우호의 표시로 받아들여졌고, 조선과 유구간의 통교를 잇는 명분이 되었다. 남방물산의 교역은 일본상인이나 동남아제국에 의해 대행될 수도 있었지만 피로인 문제는 유구와의 관계가 그 후에도 지속될 수 있었던 끈이 되었다. 이 점은 동시기 일본의 여러 세력들이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면서 조선과의 통교를 확보해 나갔던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다. 그들도 피로인 송환의 대가로 면포나 대장경을 요구하였고, 교역을 허가받았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피로인 송환을 정치적으로 매우 중시하였다. 세종대의 기록에 의하면 피로인 한 사람을 송환해 오는 대가로 면포 10필을 지급하였다고 한다.730)≪世宗實錄≫권 35, 세종 9년 2월 경신.

 당시 유구는 왜구들에 의해 납치된 조선인 포로들이 전매되어 모이는 집산지로 일종의 노예시장이었다. 유구는 이 피로인들을 대조선 통교무역에 이용하였다. 유구에 의한 피로인의 송환은 고려말 찰도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종 10년(1410) 思紹代에 이르기까지 모두 7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송환방식은 모두 유구사절과 동행하는 형식이었다. 한편 조선정부가 직접 사절을 파견해 피로인을 쇄환해 오기도 하였다. 최초의 사례는 태종 16년 이예를 유구국통신관이란 직함으로 유구에 파견해 44명의 피로인을 쇄환해 왔고, 세종 19년(1437)에는 왜통사 김원진을 보내 6명의 피로인을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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