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이후에는 왜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피로인도 점차 없어지게 되었고 대신 표류민의 송환이 중심이 되었다. 이 양상은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선명하게 구분이 된다. 유구에서 피로인을 송환한 마지막 해는 세종 19년이고 표류민의 송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은 단종 원년(1453)이다. 조선 전기 유구에 의한 조선 표류민 송환은 모두 12회에 달한다. 송환방식은 유구사절에 동행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본인의 방해와 위사의 성행에 따라 명종 원년(1546)부터는 중국을 경유하여 송환되었다. 유구의 進貢使와 조선의 冬至使가 북경의 회동관에서 만나 표류민을 인도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중종 25년(1530) 조선에서 표착유구인을 중국을 통해 송환한 이래 상례화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도 표착한 유구인을 성의있게 송환하였다. 조선의 유구표류민 송환은 세종 11년 강원도 울진에 표착한 15인을 송환하여준 이래 선조 22년(1589) 전라도 진도에 표착한 유구상인 30명을 송환하기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표류민에 대한 양국간의 송환체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조선과 유구정부의 태도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와 같이 피로인과 표류민의 송환이야말로 양국간의 통교에 있어서 일차적인 명분이었으며 그것을 지속시킨 유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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