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5) 문물의 교류와 상호인식
  • (3) 상호인식

(3) 상호인식

 조선 전기 나름대로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조선과 유구 양국의 상호인식은 어떠했을까. 유구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광해군 3년(1611) 북경에서 李睟光과 만난 琉球進貢使 蔡堅은 유구가 어느 나라와 가장 가까운지를 묻는 이수광의 질문에 대해 “중국이 가장 가깝고 다음이 조선이다. 지난번 귀국에서 표류인을 송환해 주었는데 그 사람들은 지금도 北山에 살아있다”라고 하면서 우호적인 감정을 나타냈다.734)李睟光,≪芝峰先生集≫권 9, 琉球使臣贈答錄. 유구인에게 비친 조선은 자국의 표류인을 성의있게 송환시켜주는 인도적인 나라로 보여졌던 것 같다. 그들 또한 조선 전기 이래 자국에 표착한 조선인에 대해 후하게 대접하고 송환해주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전기 유구의 대조선인식을 정리해 보면, 우선 물자가 풍부한 대국으로 인식하였다. 유구에게 있어서 조선은 남방물산을 선호하는 대신 섬유와 문방구류 등 유구가 선호하는 물산이 풍부한 나라로서 통교무역의 좋은 대상국이었다. 다음으로는 문화선진국, 특히 불교문화의 선진국으로 존숭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양국이 비록 명의 책봉국가였지만, 유구는 조선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위국가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신하로 자칭하면서 조공의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은 山南王 등 유구 망명자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태조 3년(1394) 조선에 도망한 산남왕자 承察度의 인도 요청과 태조 7년 산남왕 溫沙道의 망명 등 두 사례가 있다. 이 점도 유구의 조선인식 내지 양국간의 관계에 있어서 상당히 흥미있는 요소이다.

 한편 조선에서는 유구를 동남아제국과 비슷하게 보면서도 그와는 약간 다른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건국 초기와 세종대 이후에 걸쳐 접대방식이 크게 달라짐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조선에서 유구에 대한 정보는 유구에 파견된 사신이나 표류민들의 직접적인 견문이 일차적이었고, 다음으로는 宣慰使의 접대시나 왕의 인견시 유구사신과의 문답을 통해서 얻었다.≪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사신을 접대한 선위사들의<聞見事目>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3차에 걸쳐 유구국왕사로 왔던 일본승 道安을 통해 전래된 바가 많았다. 조선 전기 유구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집대성되어 있는 것으로는≪海東諸國紀≫를 들 수 있다.≪해동제국기≫에는<琉球國紀>와<琉球國圖>가 있고, 또 연산군 7년(1501) 유구국왕사가 왔을 때 선위사 成希顔이 문답한 후 기록한<琉球國>이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유구국기>는 國王代序·國都·國俗·道路里數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유구국왕의 이름과 차례, 대조선 내빙현황, 수도의 위치와 물산, 풍속, 조선과의 교통로와 거리 등이 간단히 서술되어 있다.

 신숙주의 유구인식은≪해동제국기≫에 유구를 포함시켜 저술한 사실에서 보듯이 유구를 나름대로 중시하였으나, 사신의 ‘來朝’, ‘方物의 헌상’ 등의 용어에 보이듯이 조공국시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신숙주뿐만 아니라 당시의 조선관인들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즉 세조 13년(1467) 梁誠之는 유구국사에 대한 예물의 과다함을 비판하면서 올린 상소에서 “유구는 작은 나라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다. 비상시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만일 절교하더라도 잃을 바가 없다. 이웃 나라이면서 대국인 일본과의 균형문제도 있으니 과다한 지출은 불요부당하다”고 하였다.735)≪世祖實錄≫권 43, 세조 13년 8월 기해·경술. 이와 같이 비록 유구를 외교의례상 敵禮國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일본과는 구별하여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한편 유구의 의복제도와 관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지만 문화와 풍속에 대해서는 일본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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