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6. 동남아시아국가와의 관계
  • 1) 통교관계의 성립과 전개
  • (1) 통교의 기원

(1) 통교의 기원

 전근대 동양사회에서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에 해당하는 국가들을 총칭하여「南蠻」이라 불렀다. 이는 아마 중국에서 남만이라 불렀던 명칭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남만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華夷思想에 입각하여 중국 남부지역의 부족을 남만이라고 불렀는데, 그 후 태국·루손·쟈바 등 남부해양에 있는 여러 나라를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한편 唐·宋代에는 아라비아[大食國]도 포함되었고, 明代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스페인 이탈리아 등 서양국가들에 대해서도 남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들이 동남아시아국가들을 경유해서 내항하거나 무역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서는「남만」이라는 말 이외에「南蕃」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였다.739)≪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8월 정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서는 포르투갈·스페인 등에 대해서도 남만이라 불렀다.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은 중국에서는 元과 명의 교체기였고, 일본은 남북조시대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동아시아에는 해양세력들이 성장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해상교통은 활기를 띠었다. 왜구가 극성을 부렸던 것도 이 시기였다. 동남아국가들과 유구의 상인들은 명의 海禁政策이라는 조건하에 중국·조선·일본에 남방물산을 교역하거나 혹은 중계무역을 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에 접근하면서 통교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동남아국가들이 조선으로 오는 通航路를 보면, 해류와 바람에 순응하여 각기 본국으로부터 安南-남지나해-香山澳(현 마카오)·廣東·泉州 혹은 대만-대만해협-澎湖島-유구의 首里-일본의 博多라는 코스를 거쳐 조선에 이르렀다.740)崔南善,≪故事通≫(三中堂書店, 1943), 135쪽. 그런데 당시 동남아국가들의 항해기술이나 배의 성능을 고려할 때 직접 조선까지 오는 경우보다는 유구나 일본의 박다를 경유하면서 그들을 통해 중개무역을 하는 방법이 더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당시≪조선왕조실록≫등 사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기록상 동남아국가 사절이 최초로 내빙한 것은 고려 말이었다. 고려 공양왕 3년(1391) 暹羅斛國에서 正使 奈工 일행 8명이 와서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국서에는 성명과 封印이 없어 진위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래서 국서는 접수하지 않고 사신의 인견만을 허락하였다. 3중의 통역을 거쳐 겨우 의사소통이 되었는데, 태국의 사신은 3년 전에 왕명을 받아 출발하여 일본에 1년간 체류하다 조선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동남아국가 사절의 내빙은 이것이 최초이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고려에서는 동남아국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정보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중기부터 송나라 상인들과 아라비아상인들을 통해 인도산 목면·사탕·물소뿔·상아·침향·소목·호초·유황 등 남방물산이 수입되었다. 또 충숙왕 때에는 남만인 王三錫이 상선을 타고 원에 와 있다가 충숙왕을 따라 고려에 귀화하였다.741)≪高麗史≫권 124, 列傳 37, 王三錫. 충렬왕 24년(1298)에는 馬八國[Mobar] 왕자 孛哈里가 사자를 보내어 銀絲帽, 金繡手箔, 沈香 5근 13량, 土布 2필을 진헌한 사실이 있다.742)≪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4년 6월 을축. 마팔국은 인도 동해의 코로만델(Coromandel) 해안에 있는 소국인데 면포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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