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6. 동남아시아국가와의 관계
  • 2) 접대형식과 외교체제

2) 접대형식과 외교체제

 동남아국가들이 조선에 남방물산을 가지고 와서 적극적으로 통교를 시도한 반면 조선측은 동남아국가들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조선에게 있어서 동남아국가는 일본·여진과는 달리 정치적·군사적 영향도, 또 경제적 교역이나 문화적 교류에도 별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 교역과 통교를 요청할 경우 결코 물리치거나 하는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 나라들은 좁은 의미의 事大交隣의 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교린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섬라곡국에 대해서는 회례사를 보냈으며, 조와국과 구변국에 대해서도 예조명의의 회답서계와 예물을 갖춰 보냈다. 일본인 통교자들의 빈번한 내왕에 골머리를 앓아 통제책을 강화해 나갔던 데 비해 동남아국가의 사절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후하게 대접한 편이었다. 이 점은 유구국사신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교린의 성격은 대등교린보다는 기미교린의 의미가 강하였다. 즉 조선은 동남아제국에 대해 ‘멀리서 오는 자는 후하게 대접한다’라는 전통적인 명분에 입각해 일정한 접대를 하는 한편, 그 사신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의 명예관직을 수여하는 방책을 취하였다. ‘遠人’이란 본래 화이적 의식 속에서 나온 것으로 夷狄視하는 용어이고, 授職制도 대마도나 여진인에 대해 이를 활용하여 그들을 조종하였듯이 본래 오랑캐를 기미하는 제도적 장치의 하나였다.

 동남아국가들이 사절을 통해 조선에 보낸 국서의 내용을 보면, 上國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다. 특히 조와국과 구변국의 경우는 더욱 심하였다. 조와국의 경우 스스로를 ‘蕃人’이라고 자칭하였으며, 구변국주는 국서에서 “우리들은 폐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통교방식도 조공의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동남아국가의 사절에 대한 접대의 형식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섬라곡국의 사신에 대해 서반 8품의 반열에 서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을 뿐이다.752)≪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무신. 이는 유구나 여진의 사신보다 훨씬 낮추어 대접한 것인데, 아마 조선 초기 태조대에 섬라곡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보여진다.

 동남아국가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동남아국가의 사절들의 위사 여부 문제가 계속 논의된 것도 유구의 경우와 비슷하다. 동남아국가나 일본의 무역상인들이 위사로 꾸며 접대를 받고자 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민간인들의 교류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워낙 거리가 멀고 특별한 관계가 없었던 만큼 유구와 비교해서 흔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인이 포로로 남만에 팔려간 경우도 있고753)≪宣祖實錄≫권 22, 선조 21년 5월 무오. 남만인 중 조선에 귀화한 사람도 있었다. 세종 8년 귀화한 남만인 禹信에 대해서는 면포와 정포를 각 2필씩 주고 결혼까지 시켜주었다.754)≪世宗實錄≫권 33, 세종 8년 9월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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