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2. 통치 구조
  • 2) 통치기구

2) 통치기구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 당시의 통치 체제는 易姓혁명과 제도개혁을 주도한 정도전이≪주례≫에 근거를 두고 재상 중심의 체제를 갖춘 것이어서 왕권의 강약에 따라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러므로 건국 직후에 재상이 주도하는 도평의사사 중심의 체제는 태종대의 개혁을 거쳐 왕이 주도하는 의정부-6조 중심의 체제로 바뀌었다.023) 鄭杜熙,<朝鮮建國初期 統治體制의 成立過程과 그 歷史的 意味>(≪韓國史硏究≫, 67, 1989). 세종대에는 유교적 이념이 알맞게 운영을 개선하면서 왕권과 신권이 조화되는 방향으로 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세조대에는 다시 왕이 주도하는 6조 중심의 체제를 강화하였다. 성종대에 이르러≪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집권체제가 완비되었다. 고려시대까지도 독자적인 법전을 만들지 못한 채 당과 송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의 실정에 맞추어서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독자적인 통치규범을 헌장으로 만들고 그에 입각하여 정치를 하였다는 점에 통치기구의 큰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경국대전≫은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기본법전이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통치기구는 크게 문관과 무관, 즉 동반과 서반으로 나뉘고, 다시 또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하여 편제되어 있다. 중앙의 핵심적 정치기구는 의정부와 6조였다.024) 韓忠熙,<朝鮮初期 議政府硏究(上·下)>(≪韓國史硏究≫31·32, 1980·1981).
―――,<朝鮮初期 六曹硏究>(≪大丘史學≫20·21, 1982) 참조.
의정부는 최고의 의정기관으로 領議政·左議政·右議政 등 3정승의 합의제로서 백관과 서무를 총괄하였다. 吏·戶·禮·兵·刑·工의 6조는 실제 정무를 분담하였는데, 吏曹는 문선·훈봉·고과를 주로 맡아 보았고, 戶曹는 호구·공부·부역·조세·재물관계를, 禮曹는 예악·제사·연회·외교·학교·과거를, 兵曹는 군무·우역·병기·무관인사를, 刑曹는 법률·형벌·사송·노비를, 그리고 工曹는 산림·소택·건축·영선을 맡아 보았다. 물론 6조가 의정부 산하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6조직계제가 실시될 때에는 6조의 기능이 크게 신장되어 정무처리 권한이 크게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의정부의 기능은 약화되어 결국 국왕의 자문기관에 머물게 되었다. 六曹直啓制가 실시되던 태종 14년(1414), 세종 17년(1435)과 세조 초년, 중종 10년(1515) 사이에는 「왕-6조-속아문」으로 연결되고, 議政府署事制가 실시되던 때에는 「왕-의정부-6조-속아문」의 행정체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의 80여 관아 중 대부분이 그 직능에 따라 6조에 소속된 속아문이었다. 의정부와 6조는 관직체계상으로 보아 의정부의 議政·贊成·參贊은 대개 6조의 判書·參判 등을 역임하였거나 승진하여 진출한 관직이었기 때문에 6조의 기능은 의정부 구성원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정부와 6조의 권력체계는 직무면에서 의정부는 백관 및 국정을 총괄하였고, 국정체계면에서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될 때에는 의정부가 6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6조직계제가 시행되던 때에는 6조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한편 왕명을 출납하는 비서기관으로 승정원이 있어, 이곳에는 都承旨 이하 6승지가 6조를 분담하였다.025) 金昌鉉,<朝鮮初期 承政院에 관한 硏究>(≪韓國學論集≫10, 漢陽大, 1986).
韓忠熙,<朝鮮初期 承政院硏究>(≪韓國史硏究≫59, 1987).
그러므로 승정원은 6조의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6조직계제가 실시되던 시기에는 승정원도 자연히 정치활동이 활발해졌고, 의정부서사제가 시행될 때에는 보다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왕은 국사를 의정부나 6조에 논의하기에 앞서 대개 승지와 의논하였고 여러 관아의 백관이 올린 국사도 먼저 승지와 의논하여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과 의정부, 그리고 6조의 행정계통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사헌부·사 간원·홍문관 등 三司가 있었다. 3사 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兩司 또는 臺諫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사헌부는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풍속을 교정하는 감찰기관이었다. 특히 관리임용에 있어서는 후보자의 신분 과 경력 등을 조사하여 가부를 승인하는 서경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諫諍과 논박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大司諫·司諫·獻納·正言을 두었는데, 다른 부서보다도 이곳에는 젊고 강직한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홍문관은 經籍을 모아 典故를 토론하고 문한을 다스려 국왕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고 언관의 기능도 자못 활발하였다.026) 崔承熙,≪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서울大出版部, 1976) 참조.

 사법기구로는 義禁府가 핵심을 이루었는데 관원은 거의가 경관으로 국왕 직속의 사법기능을 수행하였다.027) 韓㳓劤,<麗末鮮初 巡軍硏究-麗未 巡檢制에서 起論하여 鮮初 義禁府 成立에까지 미침->(≪震檀學報≫22, 1961).
李相寔,<義禁府考>(≪歷史學硏究≫4, 全南大, 1975).
吳甲均,≪朝鮮時代 司法機構와 運營에 관한 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특히 대역 모반 등 왕권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죄를 주로 이곳에서 처리하였으나, 때로는 일반 범죄까지도 담당하곤 하여 형조와 업무상의 중복이 생기기도 하였다. 의금부는 특히 국왕과 직결되는 반역죄를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의정부 및 양사와 합좌하여 다스렸다. 의금부 이외에도 사법기관으로는 일반 범죄사건을 다루는 사헌부와 형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는 漢城府가028) 元永煥,<漢城府硏究-漢城府의 治安業務를 中心으로->(≪鄕土서울≫40, 1982).
―――,≪朝鮮時代 漢城府 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90).
李存熙,<朝鮮初期 漢域府의 職制와 行政機能>(≪李元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6).
있어 이 3자를 三法司라 합칭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4館이라 하여 校書館·成均館·藝文館·承文院이 있었다. 교서관은 경적의 간행을 맡아 보았고, 성균관은 고등 문관의 양성기관으로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다.029) 李成茂,<鮮初의 成均館硏究>(≪歷史學報≫35·36, 1967).
申奭鎬,<李朝初期의 成均館의 整備와 그 實態>(≪大東文化硏究≫6·7, 1970).
예문관은 국왕의 교서를 제찬하였고,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또 춘추관이 있는데 이곳은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였으므로 국왕과 왕실에서 이를 중요시하였다.

 한편 중종 때 변방지방의 방비를 목적으로 설치한 備邊司가 명종 10년 (1555)부터는 상설관아로 발전하였으며, 뒤에는 군정뿐만 아니라 민정·외 교·재정 등 전반적인 내용들을 문무고관들이 모여 협의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종래 최고 정무기관이던 의정부는 그 기능을 잃어 갔고, 인조 반정 이후부터는 反正功臣들이 비변사 당상을 겸하기도 하여 사실상 비변사 는 정부기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정부조직과 관련하여 지방의 행정조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은 전국을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영안(함경), 평안도 등 8도로 구획하고, 도 아래에는 府·牧·郡·縣을 두어 군현 중심으로 통치행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030) 조선왕조의 지방행정조직에 관하여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李存熙,≪朝鮮時代 地方行政制度硏究≫(一志社, 1990).
李樹健,≪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金武鎭,≪朝鮮初期 鄕村支配體制 硏究≫(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0).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지방행정은 부 4, 대도호부 4, 목 20, 도호부 44, 군 82, 현 175개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에는 觀察使가 파견되었는데 이를 道伯·方伯·監司 등으로도 호칭하였다. 관찰사는 지방장관으로서 각 도의 행정과 군사·사법 등을 관장하고 府尹·牧使·郡守·縣令(監)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는 지방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실공히 지방세력으로 토착화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견제책의 일환으로 임기제를 마련하여 한 도에서 360일 이상을 근무할 수 없도록 하였다. 군현의 수령은 대민행정을 직접 담당하는 목민관으로 역시 임기제를 실시하여 1,800일을 넘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수령은 900일 임기제를 시행하였다. 관찰사나 수령은 모두 자기 출신지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자기 친족들과의 연결을 막아 그들의 세력확대를 통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리고 관찰사 및 부윤·목사를 보좌하기 위하여 도에는 都事를, 부와 목에는 判官을 파견하였다.

 수령의 주요 임무는 이른바 「수령 7사」라 하여 農桑盛·學校興·詞訟簡·奸猾息·軍政修·戶口增·賦役均의 임무를 부여하였다.031)≪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1월 신묘.
≪成宗實錄≫권 15, 성종 3년 2월 임신·신묘.
≪經國大典≫권 1, 吏典 考課.
고려시대 이래 태종 이전까지는 「守令五事」가 있었으나, 태종 6년부터 「守令七事」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수령이 수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 7사의 이행과 함께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효과적으로 징수하고 이를 상납하는 문제였다. 즉 조세의 중앙조달이었는데, 그것은 효과적인 민정과 국가의 운영에 재정적인 문제가 반드시 수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령의 직무수행을 돕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모든 지방행정 단위에 중앙의 6조처럼 이·호·예·병·형·공의 六房을 조직하고 그 지방의 향리가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6방의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지방에 파견된 수령은 그곳의 사정에 어둡고 생소하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지방의 향리들을 잘 통솔하여야 했고, 또한 토착 재향품관들의 자문과 협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鄕廳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설치 운영되었는데, 고려 말 이래 지방의 양반들이 자치단체로 만든 유향소의 후신이다. 유향소가 은연중에 지방 양반들의 세력기반으로 확대되어 가자 정부는 이를 우려하여 폐쇄시킨 적도 있으나 다시 향청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어 지방의 통치기구로 활용되었다. 향청에는 座首와 別監이 있어서 수령을 보좌하고 지방풍속을 바로잡으며 향리들을 규찰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울에는 각 지방 출신의 중앙관리로 구성된 京在所가 있어 그 지방 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하고 서울과 지방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서울에 설치된 경재소가 많을 때에는 330개소나 되었는데 이곳에서 유향소의 인사권까지 장악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유향소는 태종 6년(1406)에 혁파되었다가 성종 때 金宗直 등의 건의로 복립되어 활동하였고, 선조 36년(1603)에는 비변사의 건의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경재소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활용되었다. 경재소 관리가 각기 자기의 지방 연고지를 맡아서 제반 사무에 관여케 한 것 등이 그 예가 된다. 즉 2품 이상의 경재소 관리는 8향을 겸임토록 하고, 6품 이상은 6향을, 참하관은 4향을, 그리고 무직자는 2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032) 8鄕은 父의 內外鄕과 母의 內外鄕, 處의 內外鄕, 祖의 外鄕, 그리고 曾祖의 外鄕을 말하고, 6鄕은 8鄕 중에서 妻의 內外鄕만을 제외한 나머지이며, 4鄕은 父의 內外鄕과 母의 內外鄕을 말한다. 그리고 2鄕은 부모의 內鄕만을 지칭하여 이를 겸임토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방의 향리 중에서 한 사람을 서울에 파견 상주케 하고 그 고을의 공부를 수납하도록 한 京邸吏 혹은 京主人제도가 운영되고 있었고, 감영에는 營邸吏(營主人)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향청의 설치와 운영, 경재소 및 경저리제도의 마련은 모두 在地士族과 향리들의 협조와 견제를 꾀하여 지방통치의 효과를 높이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중앙집권화 정책을 수행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군사조직은 정치권력과도 연결된 것으로서 집권화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차적인 정책과제들이었다.033)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에 대해서는 아래의 책들이 참고 된다.
陸士 韓國軍事硏究室,≪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陸軍本部, 1968).
車文燮,≪朝鮮時代 軍制硏究≫(檀國大出版部, 1973).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군제의 개편작업을 착수한 것도 태조의 정치생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태조는 義興三 軍府를 두어 병권을 장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직 종친과 훈신들이 보유한 사병때문에 국가에 의한 병권의 완전 집중이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종 2년(1400), 결국 세자 李芳遠은 모든 사병을 혁파하는 데 성공하고 병권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군제 개편을 거쳐 세조 3년(1457)에는 5위가 형성되고, 동왕 12년에는 오위도총부로 개편, 이곳에서 중앙군인 5위의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5위는 中衛(義興衛)·左衛(龍驤衛)·右衛(虎賁衛)·前衛(忠佐衡)·後衛(忠武衛)를 말하는데 이들은 각기 그가 통할하는 지방이 지정되어 있었다. 의흥위는 서울 중부와 개성부·경기·강원·충청·황해도를 통할하였고, 용양위는 서울 동부와 경상도를, 호분위는 서울 서부와 평안도를, 충좌위는 서울 남부와 전라도를, 충무위는 서울 북부와 영안도를 각각 담당하고 통할하였던 것이다. 또 각 위는 5部로 구성되었고 각 부는 4統으로 나뉘었으며, 각 통 밑에는 旅·隊·伍·卒의 계통이 세워져 있었다. 5위는 甲士와 같이 試取에 하여 선발된 직업군인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나, 양인 중에서 의무적인 군역으로서 중앙에 번상시위하는 正兵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제에 있어서 5위의 중앙군 못지않게 중시된 것이 지방군이었다. 지방군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는 세조 원년에 실시된 軍翼道체제로부터 시도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원화되어 운영되던 군사조직을 단일화시킨 것으로서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좌·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주변 여러 고을들을 이곳에 소속시켜 하나의 군사단위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종래 남방에서는 주로 연해 방어에 치 중하여 營鎭軍을 중심으로 군사조직을 갖추었고 평안도와 영안도 지역인 북 방에서는 익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조직을 갖추었으나 이를 북방의 예에 따라 전국적으로 통일하여 운영하였다. 영진군은 양인농민을 기간으로 한 군사조직인데 농번기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에 훈련을 받다가 유사시에 싸움터에 나가는 병농일치의 군대였다. 이와 같이 鎭을 중심으로 하는 영진군의 방어체제는 외침을 받아 이것이 무너진다면 무인지경이 되어버린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북방 군익체제의 편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익도체제는 곧 이어서 鎭管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주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익·좌익·우익으로 편성되던 종래의 체제가 병사가 있는 곳을 主鎭이라 하고, 그 밑에 주요한 지역을 巨鎭으로, 그리고 주변지역에 諸鎭을 설치하여 거진에 속하도록 하였다. 거진에는 부윤과 목사가 각각 節制使와 僉節制使를 겸직하면서 진관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그 아래의 제진에서는 군수 등이 同僉節制使의 직함을 겸하면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예를 들면, 忠州鎭管僉節制使인 충주목사는 그 관하의 淸風·丹湯·槐山 등 군수, 延豊·陰城·永春, 그리고 堤川현감을 지휘한 것이 그것이다.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지방의 군사제도는 도에 병영과 수영을 두고, 이곳에는 병마절도사(兵使)와 수군절도사(水使)가 파견되어 각 도의 군사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병사는 경기도와 강원도에 각각 1명씩을 두었으며, 경상도와 함경도에는 각각 3명씩 그리고 그 나머지 도에는 각각 2명씩 두었다. 한편 수사는 강원도와 황해도에 각각 1명씩을, 함경도와 경상도·전라도에는 각각 3명씩,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각각 2명씩을 두고 있었다. 이 때에 각 도의 관찰사는 병사와 수사를 겸하였고, 도에 따라서는 병사가 수사를 겸한 예도 있었다.

 진관체제 아래에서의 병력도 영진군체제에서와 같이 양인농민들이 중심병 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상시에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단 징발되면 정병으로 서 서울에 번상하거나 지방의 제진에 배치되어 방위 임무를 맡게 된다. 양인 모두가 현역군인인 정병으로 징발되는 것은 아니다. 16세부터 60세까지의 丁男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정병으로 징발되지 않은 정남은 정병을 재정적으로 돕는 奉足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세조대에는 이른바 保法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정남 2명을 1保로 한 군호의 기본단위로, 갑사·정병·수병 등 병종에 따라 봉족의 수를 다르게 제한하여 그 경비를 조달케 한 것이다. 그러나 점차 경비의 조달과정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확한 호구 파악이 어렵고 정남 수에 따르는 공납부담의 혼잡, 그리고 대가를 받고 병역을 대신 치르는 자가 생겨났다. 이에 병조에서는 병역의무자로부터 布를 징수하여 이것으로 군인을 고용하는 제도를 구상하였고, 지방에 있어서도 지휘장교가 포를 받고 병졸을 풀어주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또한 지방의 각 진관에서도 정병이 일정량의 포를 진관에 바치고 그곳의 防戌의무를 면제받는 放軍收布制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결국 양반의 자제는 병역의무가 주어졌으나, 실제로는 의무를 실천하지 않았으며, 향리와 공사노비도 그들에게 부과된 役이 있기 때문에 병역의 의무는 지지 않았다.

 한편 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한 烽燧制가 활용되었고, 공문서의 전달과 관물의 수송 그리고 관리들의 여행에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 수행을 위한 역마제도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의 정치구조로 교육 및 과거제도를 살필 수 있다. 교육은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하되 관리 양성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교과과정과 내용도 과거준비를 위한 유교경전과 한문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양반 자제들은 7, 8세가 되면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의 초보와 글씨쓰기를 배우고 그 뒤에 15, 16세가 되면 서울에서는 四學에 진학하고, 지방에서는 鄕校에 입학하였다. 4학은 동·서·남·중부에 설립한 四部學堂을 말하며 그 정원은 각각 100명씩으로 제한하였다.034) 李光麟,<鮮初의 四部學堂>(≪歷史學報≫16, 1961). 향교는 지방의 부·목·군·현에 각각 1교씩 설치하고 지방 양반이나 향리적 자제를 입학시키도록 하였다. 수용인원도 제한하여 부·목에는 90명 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으로 한정했다.035) 李成茂,<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申千湜,<朝鮮初期 鄕校職官 變遷考>(≪關東大學論文集≫6, 1977).
사학과 향교에서 수학한 유생들은 진사시에 응시하는데, 합격하면 生員 또는 進士라고 불렀다. 생원과 진사는 서울의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이 허용되었다. 성균관은 입학정원이 처음에는 200명이었으나, 뒤에 100명으로 줄어들었다.036) 李成茂, 앞의 글(1967). 성균관과 향교에는 공자 이하 저명한 유학자를 모시고 제사하는 文廟와 講學을 하는 明倫堂이 갖추어졌으며, 성균관에는 東齋와 西齋를 갖추어 유생들을 이곳에 유숙시켰으며, 사학에는 문묘를 설치하지 않았다.

 한편 기술학인 譯學·陰陽·律學·算學 등은 주무관청인 司譯院·觀象監·刑曹·戶曹에서 각기 교육하였다. 기술학의 교육은 대개 중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에 기용되었다. 양반 자제들은 기술관교육이나 잡과에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기술관직은 중인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과거시험 제도는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시되었다.037) 宋俊浩,<李朝 生員進士試의 硏究>(≪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한 연구보고서≫30-사회과학 7-, 문교부, 1969).
曺佐鎬,<李朝 司馬試考>(≪成均館大論文集≫14·16, 1969·1971).
관리선발을 위한 시험제도인 과거제는 유교적인 양반관료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조치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2품 이상의 관리 자제에 한하여서만 음서의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입사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 과거는 문관·무관·기술관을 뽑는 시험으로 구분되었다. 문관 채용시험은 生進科(소과)와 文科(대과)의 두 단계로 나뉘었는데, 생진과에는 4서 6경으로 시험하는 생원과와 詩·賦·表·策 등 문장으로 시험하는 진사과가 있었다. 3년마다 실시되는 정기시험은 각 도별로 1차 시험인 鄕試를 실시하여 여기에서 과별로 700명씩을 선발하고, 다시 이들을 서울에 모이게 하여 제2차 시험인 覆試를 실시하여 과별로 100명씩 뽑아서 이들 합격자에게는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주었다. 이들 생원과 진사는 초급 문관에 임용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동시에 대과에도 응시할 수 있었고 또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문과는 생원·진사와 성균관의 유생들이 응시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각 도별로 1차 시험인 初試와 서울에서 시행하는 2차시험인 복시를 거친다. 복시에서는 33명을 선발하는데 이들 33명은 다시 국왕이 참석하는 제3차 시험인 殿試를 실시하여 그 성적에 따라 갑·을·병 3과로 등급이 결정되고 등급에 따라 관직도 주어진다. 예를 들면 갑과에서 1등을 한 壯元은 신규로 관리로 임용된 때에는 참상관으로 등용되고, 승진자의 경우에는 그의 관계를 4등급 올려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결국 정기시험의 합격자는 생원 100명, 진사 100명 그리고 대과 33명이었다.

 과거 응시자격은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양인의 자제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문무관 선발시험은 거의 양반자제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고,038) 崔永浩,<朝鮮王朝前期의 科擧와 身分制度>(≪國史館論叢≫26, 1991). 기술관시험은 서리 등 중인이 주로 응시하였던 것이다. 과거에 응시할 때에는 戶籍과 保單子를 제출하도록 하고, 父·祖·曾祖·外祖 등 4조를 적어 가문과 파벌까지를 분명하게 하려 한 것은 관리 임용과정에서 양반 신분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무관시험인 무과는 문과와 달리 소과가 없고 바로 대과인 초시·복시·전시의 절차를 거쳤다.039) 尹薰杓,<朝鮮初期 武科制度硏究>(≪學林≫9, 延世大, 1987). 초시에서 200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28명을 확정짓고, 마지막 전시에서는 격구로서 등급만을 결정 짓도록 하고 있다. 무과의 응시자격은 무관의 자제·향리, 그리고 양인으로서 무예에 특별히 소양이 있는 자 등이 응시할 수 있었고, 조선 말기에 가서는 제도가 해이해지면서 천민들까지도 응시하여 관계로의 진출을 꾀한 바도 있다.

 기술관 채용고사로는 잡과가 있다. 잡과에는 대개 중인들이 응시하였고 이들은 세습적으로 기술직에 종사하였다. 기술직은 문관직이나 무관직에 비하여 천시되었는데, 이들을 선발하는 절차도 문·무관과는 달리 각기 해당 관청에서 자기 분야의 기술직을 뽑아 등용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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