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3. 경제구조

3. 경제구조

 조선왕조의 경제기반은 토지경제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토지제도의 근간이 된 것은 고려 말에 마련된 科田法이다.040) 조선 초기 과전법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이 참고된다.
金泰永,≪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知識産業社, 1983).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여말 선초에는 사회변동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재향 중소지주 출신인 신흥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대두하여 강력한 집권관료 체제를 추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전호제가 발달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양인층이 확대되고 노비의 신분이 상승되는 등 신분질서가 재편되어 갔고, 사상적으로도 불교사상에 대신하여 성리학이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아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과전법의 실시는 문무관료에게 단순히 토지를 분급하였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전법의 제정과 시행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물적 토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려 말의 권문세가의 농장 확대는 토지제도를 크게 문란시켜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진관료들의 경제생활에도 큰 불만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과전법의 제정은 조정의 재원 충당과 신진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고 그리고 도탄에 빠진 농민을 보호·육성하려는 의도였다. 과전법은 권문세가들이 넓은 私田을 소유하여 그 토지에 대한 불법적 收租權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전국의 토지를 국가의 관리 아래에 두고 국가의 수조지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과전은 양반관료들에게 지급하되 현직자와 산직자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누어 최고 150결에서 최하 10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과전의 지급대상에는 관료뿐만 아니라 항리·역리 등을 포함하여 서리와 장인·군인·학생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우는 1회로 한하였고 서리·군인·학생은 모두가 해당된 것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와 협력관계에 있던 부류에 국한하였다. 과전은 私田畿內의 원칙에 따라 경기 내에만 한정하여 분급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에는 분급지가 원칙적으로 없었으며, 다만 지방의 유력자인 한량관과 吏에게 과도적으로 군전이 지급된 바 있었다. 결국 양반관료들의 세력이 경기 이외에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서였다. 과전은 일대에 한하여 지급하도록 규정되었으나, 관리가 사망하고 그 처가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게 되면 그에게 守信田이라는 명목으로 그 과전의 세습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사망하고 어린 자녀들만 남았을 경우에도 恤養田이라 하여 전수를 허가하였다. 즉 과전은 그 수득자의 직무이행과 직결되어 지급되면서도 世祿으로서 관의 공인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그 자손에게 전수되고 있었다.

 양반들은 관료로서 과전을 지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功臣田도 받았다. 공신전은 국초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의 정변이 있을 때마다 공을 크게 세운 유공자들에게 지급하였다.041) 조선 건국 후 성종 2년까지 약 70년 간에 8종의 공신이 나타났다. 즉 위화도회군 때의 공신을 포함하여 개국공신 52명, 定社공신 29명, 佐命공신 46명 등이 그 예가 될 수있다(鄭杜熙,≪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一潮閣, 1983 참조). 또 別賜田이라 하여 왕의 특명에 따라 공이 인정되는 자에게 수시로 지급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개는 외교에 특별한 공적이 있거나, 국왕에 대한 역모계획을 사전에 적발하여 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한 것 등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지급하였다. 또 한량으로서 서울에 올라와 1년 중 일정 기간을 시위하는 조건으로 군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과전법체제 아래에서 이 밖에도 陵寢田·倉庫田·宮司田·內需司田·學田·寺社田 등의 토지 지목이 있었다. 능침전에 관해서는≪萬機要覽≫에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보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능침전이라는 것은 능묘의 수호를 위해 마련한 토지라는 뜻으로 이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고전과 궁사전은 「5庫 7宮」이라 하여 왕실의 사유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 내수사전은 고려시대의 內莊田과 유사한 것으로서 왕실 내에서 소요되는 경비 충당을 목적으로 한 토지였다. 학전은 각급 학교에 지급된 토지이고, 寺社田은 사찰에 분급된 토지였으며, 그 밖에도 군의 경비 충당을 위한 國屯田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국둔전의 기원은 삼국통일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당군의 군량 마련을 위하여 국둔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고려시대에 국둔전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 군사 이외에도 향·소 등의 예민집단에 의하여 경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천민집단이 점차 혁파되고 해체되어 가자 국둔전은 이제 일반 민초의 부역에 의해 경작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한 민폐가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국둔전은 한때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그 필요성이 요청되자 세조 때에는 다시 설치 활용되었다.

 한편 전술한 바와 같이 과전은 경기도 내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관리 수의 증가와 과전의 세습, 그리고 토지의 한정 등으로 인하여 자연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세조 12년(1466)의 職田法과 성종 원년(1470)의 官收官給制, 그리고 명종 12년(1557)의 현물 녹봉제 등의 실시를 보게 되었다. 직전법은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분급하여 과전법에서의 散職者와 수신전·휼양전에 의한 토지분급을 그 대상에서 제외시켜 분급되는 토지의 결수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현물 녹봉제의 실시란 실제로 토지분급이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전법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一田一主의 원칙에 의하여 토지분급 제도가 정비됨으로써 고려 말기 권문세가의 불법적인 수취 하에 있던 농민들을 보호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당시 농민의 대부분은 권문세가의 광대한 토지를 借耕하는 無田民이었다. 그들은 추수기에 수확량의 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한 토지에 여러 명의 지주가 있어 조세를 징수해 가기도 하였다. 조선의 건국 후에는 이러한 지주들의 무질서한 착취와 가혹한 수탈을 어느 정도 제한하였다. 한편 조선 초에는 자영농 확보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지주와 전호 간에 이루어지던 병작을 금지시킨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병작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과부·고아·홀아비 등과 같이 노동력이 없는 자에게는 3∼4결 정도의 그리 넓지 않은 토지에 한하여 병작을 허용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초의 농민들은 경제기반이 향상되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를 전세·공물·군역·요역 등 국가적 수취기반으로 생각하고, 농민을 국가존립의 경제적·사회적 기초로 삼았다.

 농지는 식량생산의 기초가 되고, 농산물은 경제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기, 어느 왕조에서나 경지면적의 확대가 중요시되어 왔다. 여말 선초에 있어서도 경지의 개간은 계속되어≪世宗實錄地理志≫편찬 당시까지 약 39만여 결이나 증가하고 있었다. 개간지에 대한 소유권은 물론 起耕者가 갖게 되어 있어서 농민이 토지를 소유할 기회도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所耕者를 포함하여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7할 가량이나 되었다. 물론 이 중에는 1결 미만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도 있었고, 2∼3결 정도의 토지를 가진 영세한 농민도 상당히 많았다.

 농민의 所耕田은 민전이며, 민전은 농민뿐 아니라 모든 사회계층의 소유지이다. 조선시대 전지의 대부분은 민전이다. 민전은 매매·상속·증여·전당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는 사유지로서 그 경작권과 소유권이 보장되고 있다.042) 李載龒,<朝鮮初期 農民의 土地所有>(≪朝鮮初期 社會構造硏究≫, 一潮閣, 1984).
金泰永, 앞의 책(1983) 참조.
민전은 수조관계로 보면 국가수조지이지만 소유관계로 보면 민유지이다. 민전에서는 전세 이외에도 요역과 공물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전의 종류는 경영형태로 보아서 자영형·농장형·병작형 등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자영형은 농민이 자영하는 경영형태이고, 농장형은 주로 전호 및 노비에 의하여 경작되는 것이며, 병작형은 전호에 의하여 경작되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역대 국왕들은 강력한 권농정책을 추진하여 농산물의 증대를 꾀하였다.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알맞는 농법을 제시한≪農事直說≫과≪衿陽雜錄≫등이 간행되고 새로운 농법으로 이모작·이앙법 같은 것이 점차 보급 되어간 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원래 우리 나라의 기후조건은 비가 적지도 않고 그리 많지도 않은 반쯤은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논농사보다는 밭을 이용하는 경작이 훨씬 많았고, 또 시비기술도 후진적이어서 여말까지는 농지의 이용도가 크게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초에 이르러 시비법의 개발로 비옥한 토질 조성에도 성공하였고, 관개시설을 개선하기 위하여 저수지를 보수하거나 신설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5세기 중엽에는 전국 각 처에 3천여 개소의 저수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수차를 이용한 관개 능률을 높임에 따라 수전경작의 비중이 크게 높아져 전에 비하여 벼의 생산량이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밭농사에 있어서도 파종 및 경작방법의 개선으로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콩과 보리의 이모작도 이 때에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논농사에 있어서도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물사리방법(水耕法)과 못자리 판을 이용하여 옮겨 심는 모내기방법(移秧法)이 병행되다가 점차 모내기방법으로 확대되어 갔다. 모내기는 고려시대 이래로 경상도지방에서 널리 행하여져 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것이 중남부지역으로 전파되어 갔다. 이 농법은 제초작업에 드는 노동력이 크게 감소되어 동일한 노동력으로 재래방법보다 약 4, 5배 가량의 농토를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모내기철에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차질이 생긴다는 단점도 있어서 국가에서는 모내기의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적극적인 권농정책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세종 26년(1444)에 농지 1결에서 생산된 수확량이 무려 최고 1,200두·최하 400두였다는 기록이 있어, 1결당 평균 300두의 소출을 거두었던 고려 말의 경우와 비교해서 크게 생산량의 증가를 보인 것이 입증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경제생활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무명을 위시하여 삼베·모시짜기와 누에치기의 발달이다. 고려 말의 文益漸에 의해 전래된 목화는 경상도에서 처음 재배하기 시작하여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보급됨으로써 일반 서민충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개선되었다. 무명은 의복의 기본재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화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과전법의 시행은 여말에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새 왕조 조선의 경제기반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국가재정의 근원이 되는 조세제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043) 李載龒,<朝鮮初期 田稅制度硏究>(≪韓國史學≫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조선 초기의 조세 제도는 과전주인 양반은 경작자(佃戶)로부터 수확량의 1/10을 전조로 받고 그 중에서 1/15을 지세로서 정부에 납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토지의 수확량은 그 땅이 비옥한 것이냐 척박한 것이냐에 따라 동일하지 않았고, 풍년과 흉년에 따라서 차이가 심한 데도 불구하고 매년 거의 일률적으로 조세를 부과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세종 26년에 토지의 비척을 기준으로 6등급으로 나누고, 풍흉을 기준으로 9등급으로 구분, 차등있는 조세액을 마련하고 이를 시행토록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종래의 조는 1결당 수확량의 1/10인 30두였으나, 개정된 貢法에 따라 1결당 수확량의 1/20인 4∼20두로 정하였으며, 전세 기준도 종래의 踏驗損實法으로부터 토지의 비척과 풍흉에 따라 합리적으로 조세액을 조정한 것이다.

 한편 정부는 20년마다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토지대장을 정비함으로써 전지와 그 소유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1등전은 조선 초기 이래 인조 12년 이전에 약 2,700여 평이며, 6등전은 1,000여 평으로 알려졌고, 땅이 비옥한 삼남지방의 토지는 대부분 1등전이나 2등전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남지방은 그만큼 담세율이 커지게 되고 국가 역시 삼남지방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높았던 것이다.

 농민들의 국가에 대한 부담 중에 가장 컸던 것은 貢納이었다. 공납은 호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농민이 가옥을 소유한 대가로 지방토산물을 무상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 토산물은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말한다. 그러나 특산물이 아닌 것은 정부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무리한 문제점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나 관청에서는 그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조달하여 사용한 뒤에 그 대가를 농민들로부터 받아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은 이러한 폐단이 크게 논란이 되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 大同法이 실시되면서 공납의 폐단은 다소 시정되어 갈 수 있었다.

 徭役 또한 농민의 부담으로 작용되었다. 요역은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남자들이 져야했던 身役이었다. 법제상으로는 8결의 토지를 경작하는 집에서 1명의 요역자를 뽑게 되고, 신역은 1년간 6일 이내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丁男 모두가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행과정에서 법으로 정한 일수보다 훨씬 연장되는 경우가 많았고, 권세있는 사람의 몫까지 담당하여야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농민들을 크게 괴롭혔다. 또한 양인이 국가에 지는 의무로서 군역이 있는데 이것도 농민들에게는 아주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토지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밖에도 수공업 및 상업이 행하여지고 있어서 국가나 국민경제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수공업은 대체로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는 가내수공업이었고 면직업이 주가 되고 있었다. 종래에는 絹織·麻織·苧織 등 직포업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조선 초기 목면의 재배가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면직이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면직물은 농민들의 의료와 군복재료 그리고 무역품으로 정부의 수요품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수세에 면포를 대납하도록 권장한 바도 있었다.044) 高承濟,≪近世韓國産業史硏究≫(大東文化社, 1959).

 조선시대의 수공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관영수공업이었다. 공장은 모두 工匠案에 등록된 官匠으로서 서울의 여러 관서와 지방의 감영·병영·수영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서울의 관서에 소속된 사람을 경공장이라 하는데 軍器監에 640여 명, 司饔院에 380명, 尙衣院에 590여 명, 造紙署에 91명 등 모두 129종 2,800여 명에 이르렀다. 또 지방관서에 소속된 사람은 외공장이라 하여 27종 3,800여 명으로서 경·외공장이 도합 6,600여 명에 달하였다.045) 姜萬吉,<朝鮮前期 工匠考>(≪史學硏究≫12, 韓國史學會, 1961).
劉承源,<朝鮮初期 京工匠의 官職-雜職의 受職을 중심으로->(≪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이들 관장은 공노비가 주를 이루었고 양민들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 수는 얼마되지 않았다. 관장들은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소정의 공장세를 내면 판매할 수도 있었고, 官役에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영수공업 활동을 자유로이 행하여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공장안에 등록된 관장 이외에 사영수공업자인 私匠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문을 받아 생산하기도 하였으나 농기구를 제작하여 농민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이 밖에도 사원에서 행한 수공업으로서 製紙·製麵·釀造 등이 있었다.

 상업도 수공업처럼 국가에 의해 장악되고 있어서 관청이나 양반들의 수요에 충당하는 어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서울 종로거리의 市廛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것은 정부가 점포를 상인에게 대여해 주고 그 대가로 점포세와 商稅를 거두어 들였다. 시전은 후에 六矣廛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046) 劉元東,<서울 六矣廛연구>(≪歷史學報≫8, 1955). 지방에는 각 지역에 場市가 서게 되었고, 15세기 중엽부터 대두한 장시는 농산물의 증가로 말미암아 점차 발달되었다. 정부에서는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장시로 몰려드는 것을 막고자 장시금지령을 내렸으나, 그 추세를 막기는 어려웠다. 장시는 상설시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5일장으로 정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褓負商에 의하여 농산물·수공업제품·약재·수산물 등 각종 물품이 유통되었다. 이들 보부상은 전국적으로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상권을 확대시켰다.047) 柳子厚,≪朝鮮褓負商攷≫(正音社, 1948). 육로의 보부상에 해당하는 수로의 행상인 船商도 있었으나 활동은 비교적 활발하지 못하였다.

 상업활동이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화폐경제도 발달하지 못하였다.048) 李鍾英,<朝鮮初期 貨幣制의 變遷>(≪人文科學≫7, 延世大, 1962).
權仁赫,<朝鮮初期 貨幣流通硏究-특히 太宗代 楮貨를 中心으로-)(≪歷史敎育≫32, 1982).
다만 태종 원년(1401)의 楮貨, 세종 5년(1423)의 朝鮮通寶, 그리고 세조 10년(1464)의 箭幣 등이 만들어졌을 뿐이며, 교역의 매개가 된 것은 주로 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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