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4. 사회신분구조

4. 사회신분구조

 조선시대의 사회신분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계층이나 신분에 대한 연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왕조의 제반 문제의 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에 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다가 70년대에 들어와서야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연구업적과 함께 진전을 보았다.049) 조선 초기 신분제에 대해서는 다음 책이 참고된다.
李成茂, 앞의 책(1980).
韓永愚,≪朝鮮前期 社會思想硏究≫(知識産業社, 1953).
―――, 앞의 책(乙酉文化社, 1983).
劉承源,≪朝鮮初期身分制硏究≫(乙酉文化社, 1987).
그런데 당시의 연구방향은 조선시대의 신분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시도로서, 먼저 양반의 실체를 해명하고, 그 다음 단계로서 사회신분과 계층구조를 전반적으로 밝히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회신분이란 전근대사회 특유의 사회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 또는 계급을 의미한다.050)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하는 지표로서 身分의 존재여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신분이란 어떤 것이냐에 대한 개념상의 용어 정의는 다음의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개인의 사회적 지위 또는 계급, ②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서열, ③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분은 사실상 인간사회에서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통사회에서만 존재하였고 근대사회에서는 소멸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의 신분구성은 크게 良신분과 賤신분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신분의 구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고대 이래로 유지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秦·漢代에 이르러 양인과 천인신분을 법제적으로 구분하였고 이것이 唐代에 와서는 뚜렷한 신분제도로서 정비되었다. 고려에서도 당의 영향을 받아 양천신분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였다.051)≪高農史≫권 84, 志 38, 刑法 1 서문. 그리하여 천인신분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았고 상전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양인신분은 관리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에 租·庸·貢賦의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 자유민이었다. 이러한 신분제는 조선사회에도 계승되어 “我國人物 非良則賤 只有二途耳”052)≪成宗實錄≫권 189, 성종 17년 3월 무신.라 한 것처럼, 사회신분이 크게 양·천의 두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천인이 아닌 사람을 양인이라 불렀다. 양인은 직업과 경제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많은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이 양반이 다. 양천신분은 혈연·직업·국역·토지소유관계 등에 의하여 몇 개의 다른 동질집단으로 재분화되었다. 이러한 신분분화는 출생할 때부터 권리와 의무가 제한되었던 천신분보다는 그러한 제한이 적었던 양신분에서 더욱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양신분 중에서 오랫 동안에 걸친 관직·문벌·토지소유·노비소유 등의 경쟁을 통하여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는 특권적인 지배신분층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적 지배신분층은 그들이 차지한 각종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법제적으로 피지배신분을 더욱 속박하게 되었다. 고려·조선사회에서 이와 같은 지배신분층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양반이었다. 양반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면서 양인을 제압하고 지배신분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조선왕조는 새 왕조의 개창 직후부터 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고 여말 이래로 문란해진 신분제도를 정비하였다. 즉 양천신분의 변정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새 왕조의 신분질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신분제도는 고려시대의 그것을 계승하면서 신분질서를 정비하여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대별되며 이들은 다시 兩班·中人·良民·賤人의 4분법적 체제로 세분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각 신분의 권리와 의무는 다르며, 이들은 고정 세습되어 자손에게 전수되고 있었다.053) 이와 같은 기존의 학설에 대하여 이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다. 즉 1971년, 韓永愚가 종래 정설처럼 되어 있던 4분법적 신분체제에 회의를 보이고, 2분법적 신분체계를 주장한 것이 그 대표가 될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양반의 개념이 조선 초기와 후기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양반은 혈연 개념이 아니라 직역 개념으로서 양반의 대칭은 백성이며, 양반과 백성이 모두 良人의 범주에 들어가며, 양인에는 또 身良役賤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법제적으로도 권리와 의무에 차등은 있지만 혈통상 자유민으로서, 세습신분이 아니라 성취신분이며, 따라서 이들은 천인과는 엄격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15세기까지는 양인이 성취신분이어서 법제적으로는 신분의 이동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특권적인 양반이나 中人이 고정된 신분층으로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양인 내의 각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능력 여하에 따라 선택한 직업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농민들도 출세에 법제적 제약이 없어서 재능만 있으면 양반으로의 출세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모든 양반이 그 신분이 항구적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초기의 양천신분제는 16세기에 이르러 士林세력이 대두되고 사림 위주의 신분 질서가 갖추어지면서 붕괴되어 갔다. 사림들은 철저하게 유학을 공부하여 上位治者 신분인 士類를 형성하고 유교적인 가족윤리를 내세워 서얼에게까지 엄격한 제약을 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良人層은 상위 양반층과 하위의 중인층으로 분화되고, 또한 농상공에 종사하는 하층 평민의 지위는 중인 밑으로 고정화되면서 16세기 이후의 조선 신분계층은 양반·중인·평민·천민의 네 신분계층으로 분화되었다는 주장이다(韓永恩, (朝鮮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成衆官의 錄事로의 一元化 과정-),≪東亞文化≫10, 1971). 이외에도 劉承源 등 신분제도를 전공하는 학자들도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조선왕조는 그 초기부터 양반신분이 다른 신분계층을 지배하면서 그들 중심의 권력구조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와 과거제도·교육제도·군사조직·토지제도·사회정책을 마련하고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사회는 어디까지나 양반 중심의 관료국가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의 양반체제는 고려의 귀족사회에 비해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즉 고려의 문벌귀족에 비해 보다 많은 가문이 조선의 양반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배층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발전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관료들은 그들이 절대적인 권위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법률적으로 신분적인 제약을 가하여 그들의 권위를 보장받으려 하였다.054) 良賤二元制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조선 초기의 양반이 문무관료집단을 총칭하는 대명사로 쓰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平民·鄕吏·水軍 등이 문과에 급제한 실례가 있고, 平民 자제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제한한 규정이 없었을 뿐 아니라, 평민도 鄕校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양반 은 중인과 향께 지배신분이고 양인과 천민은 피지배신분이다. 지배신분 중에서도 양반은 왕조를 통치한 최고의 지배자로시 이들에 의해서 정책이 입안되고 법제가 제정되고 운영되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에 점차 양인을 확대하려는 정책을 취하여 양인의 수가 전왕조에 비하여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 계층의 창출, 노비변정 사업의 추진 등이 모두 양인의 수를 증대시키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말에 지나치게 증가된 양반의 수도 줄이는 쪽이 국가 경영상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서리·향리·기술관·서얼 등의 양반 진출을 크게 억제하기도 하였다. 그 억제 방안으로, 첫째 향리의 과거 응시자격을 대폭 제한하고, 둘째 향리의 토착화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셋째 기술관이나 서리와 같이 양반이 아닌 관리들의 승진 일수를 양반보다 길게 잡았고, 넷째 서리 출신이 양반직으로 올라가는 것을 크게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영향으로 결국 양반이 아닌 관리들은 양반으로 상승하는 길이 크게 차단된 채 중인층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양반은 문무반과 문음 자제들만으로 구성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양반들도 4조 내에 顯官이 없으면 양반층에서 자연히 탈락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현관이란 부·조·증조·외조 중에 9품 이상의 양반 正職을 가진 가문을 뜻한다.

 그러면 양반은 어떠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가. 양반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큰 집에서 살았고 음서와 代加의 혜택을 받는 등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즉 조선 초기부터 특권 신분계층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 몇 가지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반들에게는 관료 진출의 혜택이 부여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시행된 과거시험과 문음은 초입사자들이 주로 거치는 방법인데,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한 官門 진입은 거의 양반 자제만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둘째, 양반들은 조선왕조의 고급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이 아닌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통상관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당상관직을 양반이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특히 기술관이나 良人妾子 등 양반이 아닌 신분에게는 限品敍用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당상관으로의 승진을 불가능하게 하고, 양반 신분에게는 한품서용 제도를 적용시키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다. 조선에 있어서 양반들이 차지할 수 있는 실직은 총 5,605과이었고 그 중에서도 466과가 모든 문반이 선망했던 요직이었다.055)≪經國大典≫에 나타난 양반의 관직 총수 및 보다 상세한 내용은 전술한 관료체제의 특징을 참고할 수 있다.

 셋째, 양반들은 군역에서도 혜택을 받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 양신분에 속하는 인정은 누구든지 군역을 지게 되어 있었다. 양반도 양신분에 속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군역을 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양반은 여러 방법과 특혜로써 군역을 면제받거나 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하였다. 그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반은 관리로 재임하고 있는 동안은 군역을 지지 아니하였다. 군역은 身役이고 관직은 職役인데 이를 신역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둘째, 성균관·향교·4학의 학생인 유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셋째, 양반 중 상당수는 甲士·別侍衛·內禁衛·內侍衛·忠義衛 등과 같은 서반 특수군에 소속되어 서반 체아직을 받음으로써 군역이 면제되었다.056)≪經國大典≫에 의하면, 합법적으로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던 양반의 수가 20,844명으로서 양반 正職 수가 2,495명, 양반 특수 체아직의 수가 2,799명, 그리고 관학생이 15, 550명이었다. 넷째, 양반 특수군이 있었다. 前銜官이나 공신자손, 문음 자손, 武才 있는 양반자손 그리고 시취에 의하여 선발되는 갑사·별시위·친군위·내금위 등의 직업군인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상의 사례들이 양반에게 부여한 군역의 혜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반에게 주어진 또 다른 특권의 하나는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양반들이 소유한 농장은 買占과 長利 등을 통하여 확대되었다. 양반들은 농장을 노비와 雇工 또는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경작하였다. 노비가 양반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농사 짓는데 드는 비용을 양반이 모두 부담하고는 추수기에 가서 양반은 소출량 모두를 차지하였다. 다만 노비에게는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지급하였다. 또 양인농민들에게 양반의 토지를 소작주었을 경우에는 농사짓는 데 드는 경비는 전적으로 소작인의 부담이 되었고 수확량의 1/2을 田主인 양반이 차지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에서는 최상급의 지배신분인 양반층이 확고해져 간 반면에 하급 지배신분으로서의 중인층이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즉 양반층은 사 대부가 중심이 되는 전·현직의 문무관집단이고, 중인층은 중앙의 서리·지방의 향리·기술관·토관·군교·서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서얼은 정처가 아닌 첩의 소생을 말한다.057) 서얼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李泰鎭,<庶孼差待考-鮮初 妾子 「限品敍用」制의 成立過程을 中心으로->(≪歷史學報≫27, 1965).
朴天圭,<朝鮮前期 庶孼의 社會的 地位>(≪史學硏究≫30, 1980).
당시 양반의 첩은 평민 부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양반이 자기 소유의 女婢를 부실로 맞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서얼은 혈통상 천한 피가 섞여 있는 예도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서얼은 양반·중인·양민신분 중 어느 곳에 편입시켜야 할지 문제가 되어 왔다.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서얼 출신의 활동이 두드러져서 국초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일파가058) 鄭道傳뿐 아니라 河崙·趙英珪·黃喜·柳子光 등은 庶孼자손의 관료들이다. 이성계의 서얼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가 전실 소생인 이방원에 의하여 제거되었고, 이방원이 즉위한 후에는 서얼에 대한 정치적 출세를 제한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강력하게 시행하지는 못하였다.≪경국대전≫에는 서얼의 자손에게 대과 및 소과의 응시를 막고 있으나, 그 밖의 과거시험에는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서얼은 사역원·관상감·전의감·내수사·혜민서·도화서·율학·산학과 같은 기술직 관청에서 일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원래 「庶孼」이란 글자가 천하거나 추한 것이 아니었음은≪史記≫·≪漢書≫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서얼을 천한 사람의 의미로 강조한 조선에서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 서얼을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혈연의 본 뜻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법제상으로까지 반영한 것은 실로 가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도전의 제거 이후 서얼의 差待法이 성문화되어≪경국대전≫에 나타난 것이다. 성종대의 권신 柳子光도 서얼이었기 때문에 戊午士(史)禍에서 그와 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낸 것이라는 불합리한 해석도 내렸고, 그 후에도 서얼금고는 더욱 엄하게 시행되어졌다. 한편 이 법이 시행된 지 1백여 년이 지나서 李珥·趙憲 등이 庶孼通淸의 의견을 朝議에 올린 바 있으나, 반대하는 조신들이 많아 선조 때에는 겨우 서얼의 과거 응시를 허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던 것은 아직도 서얼에 대한 경직된 사회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李德懋·柳得恭·朴齊家와 같은 서얼 출신의 인물들이 크게 역할을 하였지만 그 때까지도 서얼에 대한 양반사회의 시각은 매우 차별적이 고 냉소적이었다.

 한편 기술관은 역학·율학·산학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역관이 국제적인 안목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 데 비하여 율학은 국내적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역학은 漢學·蒙學·倭學 및 女眞學의 여러 분야가 있었고, 율학은 大明律이 중심이 되었다. 또 중인 신분층이 종사하는 것으로 산학을 들 수 있다. 산학의 書目으로는≪詳明算法≫·≪啓蒙算學≫·≪揚輝算法≫의 3책이 있어 이를 중요시 하였다.

 이와 같은 중인은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두 신분 사이에 존재하는 신 분계층이었다. 중인은 고려시대만 해도 양반으로 상승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새 왕조가 개창된 후에는 양반으로 진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인은 전문 행정요원이 되어 사무의 능률을 꾀할 수 있었고, 또 실무행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중인은 선초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가서야 독립된 하나의 신분층으로 확고히 굳어지게 되었다.

 양인은 천민신분과 대칭되는 양신분 전체를 가리키는 광의의 양인과 良民·常人·常民·平民·常漢 등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협의의 양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059) 양인과 양민을 개념상 구분하여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양인은 非賤人 일반인을 지칭한 데 반하여 양민은 보통사람 즉, 평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劉承源, 앞의 책, 1987 참조). 양인은 門地의 고하에 따라 양반과 구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양반의 현관과 관련이 깊다. 대체로 4조 내에 현관이 없으면 양반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신분구조를 이해하는 데 계층적 구분과 개념적 구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계층적 구분으로는 양반·중인·양민(평민)·노비의 4계층이고, 개념적 구분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양분할 수 있다. 양인은 물론 평민 이상의 신분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양인 속에는 양민뿐 아니라 양반과 중인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양인은 비천인 일반을 지칭하는 법제적 규범이고, 양민은 비천인의 일부로서 양인 중에서 평민에 해당하는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되어 쓰이고 있다. 신분사회에서는 법제적인 권리와 의무가 뚜렷하게 명시되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양반은 의무는 면제된 채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양민들에게는 권리란 전혀 부여되지 않고 의무만 부과되고 있을 뿐이었다.

 양민 중에는 상인이나 공장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직접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이다. 이들에게는 공민권이 주어져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또 관리도 될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여건상 이런 일들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농민은 정치적으로는 국가권력에 예속되고, 신분적으로는 양반층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요역과 군역·공납 등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으므로 국가 운영의 기반은 이들 농민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양민 농민이라도 그 안에는 여러 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상층은 중소지주로서 자기소유의 토지를 타인에게 대여하여 병작제로 경영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양반층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대다수의 농민은 자영농민이거나 전호였다. 자영농민은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자기 가족의 노동으로 이를 경작하였으며, 간혹 약간의 노비를 소유하거나 품삯을 받는 고공을 써서 농경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전호는 영세한 토지소유자이거나 無田農民으로서 타인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익을 반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한편 농민 이외에도 상인과 공장이 양민에 속하였으나,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농민보다 낮았다. 「農者天下之大本」을 추구하는 조선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末業으로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신분상 그들은 농민에 비하여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초에는 한량이란 계층도 있었다. 고려말 同正職이나 添設職을 가졌던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량으로 불려졌는데, 이들은 차츰 양반으로 상승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고, 그들 스스로는 사족임을 칭하면서 학문에 열심이고 향교에 입학하여 교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양민이고 직업은 농민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신분제 정비과정에서 「身良役賤」이라 불리는 양인의 하층을 구성한 신분이 나타났다. 그것은 「身=良」, 「役=賤」이라는 뜻으로서 신분은 양인이지만 지는 역은 천한 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들은 稱尺者·稱干者들이다. 稱尺者로는 津尺·楊水尺·水尺·禾尺·墨尺·刀尺·琴尺·海尺 등이고, 稱干者로는 處干·直干·國農所干·鹽干·鐵干·水站干·生鷹干·守護干·烽火千·牧子干·生鮮干·庭燎干·毛物干·營繕干·宗廟干·迎曙亭干·鮑作干·山丁干 등이다. 칭척자들은 일반 양인과 엄격히 구분되어 강제적으로 특수한 지역에 거주토록 하였고, 赴擧자격·入仕자격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그들 자손 또한 신분과 역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若父若母一賤則賤」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음은 물론이다. 처간·직간·염간과 같은 칭간자들은 고려 말에 새로 나타난 천역 부담자로서 오래 전부터 신분과 역을 세습해 온 칭척자와 성립된 시기가 같지 않다. 즉 고려 전기까지는 일단의 천역 부담자를 「尺」으로 불렀으나, 고려 후기에 와서는 「干」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신분체제를 갖추는 데 적극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신량역천」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칭척칭간자는 고려 이래로 노비에 가까운 지위에 있었으나, 결국 노비는 아니었기 때문에 양인으로 취급되었다. 이들 신량역천은 양인신분으로 인정받았지만 양인으로서의 권리인 입사자격은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이상과 같은 신량역천은 여말 선초의 신분 재편성과정에서 良賤不明者나 良賤交嫁 소생을 양인신분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설정된 과도기적 신분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사회의 신분구조에 있어서 가장 낮은 천인신분은 노비가 주를 이루 고 있었으나, 노비 이외에도 白丁·廣大·巫覡·社堂·妓女 등이 이 신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노비의 지위가 많이 개선되어 갔다. 양반이나 대지주는 토지와 노비를 많이 갖게 되었고 양인들도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사일에 있어서는 노비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다. 농경지 4∼5결 정도를 소유한 농민들은 노비없이 농사짓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즉 노비는 토지 넓이에 비례해서 그 소유 숫자가 달라졌던 것이다. 노비는 우리말로 「종」이며 노예·천예·천구 등으로 불려졌고, 그들에겐 姓을 부여하지 않았고 공민권은 물론 없었다.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역이나 군역의 의무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상전에게 몸값으로 身貢을 바칠 의무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인이 자기의 노비라도 마음대로 살해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노비는 매매·상속·양도의 대상이었고, 젊고 건강할수록 값이 올라갔다. 그리고 노비는 가옥이나 토지 등을 소유할 수 있으며, 처자를 거느리고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권도 인정받았다. 만일 노비가 국가나 사회에 공을 세 운다면 양인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노비는 크게 公奴婢와 私奴婢로 구별할 수 있다. 공노비는 독립된 가옥에 서 살면서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매년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일정한 기간을 관청에 나가서 무보수로 노동을 제공하여야 했다. 공노비는 또 納貢奴婢라고 하고, 사노비를 選上奴婢라고 했다. 납공노비는 농사를 짓는 노비로서 병작료와 신공을 바쳐야 했다. 신공으로는 무명과 저화를 별도로 납부하였다. 상노비는 대개 장인들로서 일정한 기간은 관청에 나가 무보수로 물품을 만들어야 했다.

 노비는 또 거주형태에 따라 外居奴婢와 率居奴婢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거노비는 독자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인의 간섭을 적게 받는다. 이들은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고 병작료를 바쳤고 신공을 바쳐야 했으며 주인의 집안일을 돌봐주기도 하였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함께 같은 집안에 살면서 주인집 농사를 지어주고 집안일을 보살펴 주면서 의식주문제를 해결하였다. 극히 드물게 보는 예이지만, 노비 중에서 때로는 국가에 많은 재산을 바치고 그 자식을 양인으로 상승시킨 예도 있었으며, 틈틈이 공부를 하고 성명을 바꿔 몰래 과거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인에게 총애를 받아 재산을 물려받기도 하고 첩이 되기도 한 예가 적지 않다.

 한편 천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면서 고려 말기에는 部曲民들을 많이 해방시키더니, 조선왕조에서는 수십 만의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줌으로써 천민을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었다. 태종 때에는 특별관청을 두고 노비해방을 위한 조사사업을 벌였으며, 그 후에도 약 10만명의 사원노비를 양인 혹은 공노비로 승격시켰다. 17세기에는 贖良에 의해 양인이 되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몰래 도망하여 노비신분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초기부터 노비제도 그 자체가 붕괴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해방되는 노비 이외에 상당수의 노비는 세습되고 양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관직에로의 진출도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李存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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