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Ⅱ. 중앙 정치구조
  • 1.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
  • 1) 정치구조의 정비

1) 정치구조의 정비

 조선의 중앙 정치구조는 개국과 함께 고려의 관제를 계승하면서 성립되었다. 최고 의결·국정기관에 도평의사사가 있고, 그 아래로 문하부·삼사·예문춘추관·중추원·사헌부·개성부·6조, 상서사·성균관·각문·훈련관·서운관과 봉상시·교서감 등 寺·監 및 10衛, 사선서·요물고·풍저창 등 署·庫·倉, 내시부·액정서와 전악서·아악서가 등차적으로 편제되어 각각에 부여된 일을 맡았다.

 이들 여러 관아의 국정 수행을 위한 상호관계를 보면 도평의사사는 6조 와 시·감·창·고·서 등을 총령하면서 국정을 논의·의결하고 그 집행을 지휘하였다. 6조와 시·감·창·고·서는 그 관아의 정사를 직접 국왕에게 주달하여 재결을 받아 시행하기도 하나060) 崔承熙,<朝鮮 太祖의 王權과 政治運營>(≪震檀學報≫64, 1987), 159∼160쪽. 대개는 도평의사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각각에 규정된 정무를 집행하였다.061) 韓忠熙,<朝鮮初期 議政府硏究(상)>(≪韓國史硏究≫31, 1980), 115∼118쪽. 6조와 시·감·창·고·서는 국정을 명확히 분장하지 못하였고, 6조는 장관(전서)이 朝政에 참여하지 못한 관계로 시·감·창·고·서를 확고하게 지휘하지 못하였다. 또 6조·시·감 등의 지휘체계와 관직명은 상서사·성균관·훈련관을 제외한 6조 등 모두가 장관과 차관이 2인이며, 낭관은 녹직과 겸직이 복합되었다. 직질이 같아도 관직명이 관아에 따라 달랐고, 관직명이 같아도 직질이 관아에 따라 다르기도 하여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개국 초의 정치구조는 마지막≪經國大典≫(乙巳大典)이 반포되는 성종 16년(1485)까지 왕권·의정부기능, 6조의 지위향상과 서무분장, 6조 屬司·屬衙門制의 정비, 제주(提調)제 등 겸직제의 정비, 冗官혁거, 1인의 장관을 정점으로 한 획일적인 관직제정비, 재정긴축 등과 함께 조선적인 것으로 정립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정종 2년(1400)에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편되고, 의정부가 정권을 專掌함에 따라 도평의사사 중심의 국정 운영체제가 의정부 중심의 운영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에 부수되어 중추원이 삼군부로 개칭되고 병권을 전장하였으며, 중추원 승지가 승정원으로 독립되었다.

(2) 태종 원년(1401) 의정부에 합속되어 있던 문하부가 혁거되면서 宰臣은 의정부적인 명호로 개칭되고 郎舍는 사간원으로 독립되었다. 예문춘추관이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립되었고, 승정원이 다시 승추부에 합속되었으며, 의흥삼군부 등이 승추부 등으로 개칭되고 사헌부 등의 中丞·侍史·雜端 등이 執義·掌令·持平 등으로 개칭되었다. 사간원 左·右散騎常侍가 혁거되고 左·右諫議大夫가 정3품 通政大夫 좌·우사간으로 승질·개칭되었고, 교서감이 교서관으로 개칭되면서 少監 이상 관이 혁거되었다. 동 3년에 6조의 장관과 6寺 7監의 장·차관도 각각 1인으로 조정되었다. 삼군에 각각 도총제부가 설치되면서 都總制·摠制·同知摠制·僉摠制를 두었고, 上·大護軍을 節制使·僉節制使로 개칭하였다. 또 德泉庫 등을 內贍寺 등으로 개칭하였고, 司水監 등을 司幸監 등에 합속하였다. 동 5년에 6조는 典書·議郎을 혁거하고 정2품의 판서와 정3품 당상의 참판을 두었다. 이 직후 6조에 각각 3속사를 두어 해당 조의 일을 분장하게 하였고, 의정부 등 2품 이상 10여 아문을 제외한 70여 3품 이하 아문을 그 관아의 담당 직무에 따라 6조에 분속시키고 6조로 하여금 그 아문의 행정과 인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동 14년에 시·감 등의 令·副令과 正·副正을 尹·少尹, 監·少監을 正·副正으로 체계화하였다.062)≪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정월 계사. 통례문 등의 4품 이하도 僉知事·判官·注簿·丞·副丞·副直長·錄事·副錄事 등으로 체계화하였다.

(3) 세종 2년(1420)에 集賢殿을 설치하고, 領殿事 이하의 겸관과 副提學 이하의 祿官(전임관)을 두었다. 동 5년에 조선 개국 이래로 임시기관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그 관아를 통섭한 제주와 시·감 등에 광범하게 설치된 兼判事를 통합해 각 관아별로 제주수, 實案(例兼)提調를 상정하였다.063) 金松姬,<朝驛初期의 「提調」制에 관한 硏究>(≪韓國學論集≫12, 漢陽大, 1987), 40∼49쪽. 또 開城留後司·敦寧府·仁壽府와 通禮門 등의 관원 70여 인을 태거하였다. 동 15년에는 7년 이래로 禮資寺 등에서 운영하던 久任官制를064) 빈번한 관직 교체로 인하여 업무의 일관성이 결여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효과적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제사·의례·외교·소송·군수·회계·창고·궁중사무를 관장하는 관아에 약간의 장기근무자를 확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세종 19년·세조 6년에 걸쳐 그 설치 관아와 인원수가 크게 확대되었고,≪경국대전≫에는 한성부·봉상시·군자감 등 25개 관아 49인으로 등재되었다. 공조·인수부 등 10여 관아로 확대하였다.

(4) 문종 원년(1451)에 국초부터 당시까지 변천되면서 운영되어 온 3軍-12司制의 군령체제를 3軍- 5司制로 개편하였다.065)≪文宗實錄≫권 8, 문종 원년 7월 무술. 문종 이전의 군제 변천은 閔賢九,≪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韓國硏究院, 1983), 269∼286쪽 참조.

(5) 세조 2년(1456)에 세종 초 이래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동 6년에 종친부·병조 사헌부·인수부·사간원·한성부·선공감 등 40여 관아의 관원 90여인을 감원하였고, 경창부를 폐지하였으며, 도관서 등을 사선서 등에 합속하고 전농시 등을 사선시 등으로 개칭하였다 동 12년에 의빈부·병조·한성부·사간원·변정원 관원을 감원하였고, 시·감·창·고·서 등 관아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명칭을 正·副正·僉正·判官·主簿·奉事·副奉事·參奉으로 일원화하였다. 오위진무소·중추원·상서사 등을 五衛都總府·中樞府·尙瑞院 등으로 개칭하였고, 호·형조에 算士·明律 등 本業人(전문직업인)을066) 오로지 본학인을 지칭하는 뜻으로 제학(기술학) 중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학을 전공하는 자를 의미하였다(≪譯註 經國大典≫주석편, 정신문화연구원, 1986, 60쪽). 본업인에게 제수한 관직은 호·형조 이외에 司譯院·觀象監·內醫院·典醫監·內需司·典涓司·惠民局·活人署 등에 正 이하 100여 직이 있었다. 두었다. 또 구임관제도 크게 확대하였다. 세조 12년의 이 관제개편으로 조선의 중앙관제는 거의 정립되었다.

(6) 성종 원년(1470) 사간원에 正言을 추가로 배치하였고, 領敦寧府事 등 관직을 복설하였으며, 예문관관을 증치하였다. 동 15년 이전에 호조와 형조에 전문직인 종6품의 敎授와 別提를 증치하였다.067) 구체적인 시기는 불명하나 세조 12년으로부터 성종 15년까지의 어느 시기로 추측된다. 동 15년에 전교서를 교서관으로 개칭·승격하고, 의빈부 관직명을 某某尉로 개칭하였다. 성종 15년에 개편된 이 직제가 마지막≪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조선의 중앙관제는 확립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정치구조는 개국 초의 도평의사사 체제에서 의정부·6조체제로 개편되었다. 도평의사사는 의정부로 개편되면서 소멸되고, 의정부가 6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을 통령하였다. 6조는 정2품 아문으로 격상되고, 속사·속아문제의 정비와 함께 서무를 분장하였다. 정3품 이하 여러 아문은 6조·제주(제주설치아문)나 6조(무제주아문)의 지휘를 받아 맡은 일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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