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2. 8도체제의 확립

2. 8도체제의 확립

 고려의 5도양계 체제는 이성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점차 새 왕조의 8도제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우왕 14년(1388)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의 개혁정치를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左侍中 趙浚의 다음과 같은 회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기도하다.

전하께서 汚吏가 백성을 殘虐하고, 용렬한 장수가 도적을 키우는 폐단을 분개하여 조정에 건의, 대신을 方伯에 등용하여 각 도에 파견, 출척한 결과 藩鎭이 用律에 奔敗하던 걱정이 끊어지고 수령이 奉法에 貪殘하는 폐풍이 없어졌다(≪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2월 임술).

 이 때 종래의 안렴사 대신에 비로소 都觀察黜陟使가 각 도의 장관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임명된 감사는 모두 宰樞兩府의 대신들이었고, 왕으로부터 교서와 斧鉞을 받아 임지로 출사하였다. 동서 양계는 공민왕 말년부터 都巡問使를 파견하여 군사와 민정을 관장케 하였다. 5도의 감사가 경관에서 정식 전임관으로 되었던 공양왕 원년(1389)에는 양계의 도순문사가 도절도사로 개칭되어 정식 제수되는 한편, 首領官도 배치되었으나 동왕 4년에 다시 도순문사로 바뀌고, 이것은 관찰사가 파견되는 태종 17년(1417)까지 계속되었다. 도순문사는 성격상 5도의 관찰사와는 달랐다. 그런데 5도 내지 6도 감사는 태종 17년 양계와 함께 도관찰출척사로 통일되기 전까지 감사의 직함인 안렴사와 관찰사가 수차 반복되기도 하였다.

 태조 2년 11월에는 양계를 제외한 각 도의 界首官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京 畿 左 道:漢 陽·鐵 原 京 畿 右 道:延 安·富 平 楊 廣 道:廣 州·忠 州·淸 州·公 州·水 原 慶 尙 道:慶 州·安 東·尙 州·晋 州·金 海·星 州 全 羅 道:全 州·羅 州·光 州 西 海 道:黃 州·海 州 交州江陵道:原 州·淮 陽·江 陵·三 陟

 위와 같이 획정했던 각 도의 계수관도 그 후 신축이 있었고 또 한양천도, 경기권의 재조정과 양광도의 개편에 따라 개성부를 留後司로 개칭하고 양광도를 忠淸道, 서해도를 豊海道, 교주강릉도를 江原道로 개정하였다. 조선조 지방제도의 획기적인 개혁이 태종조에 단행되었듯이 8도체제도 태종 때에 와서 확립되었다. 먼저 계수관 읍명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도명이 정착한 과장을 살펴보면 전라·경상도는 이미 고려시대에 정해졌고, 충청·황해·강원도는 태조 4년에, 平安·永吉(함경)道는 태종 13년에 개정되었던 것이며, 동 14년에는 종래의 경기좌·우도를 합쳐 그냥 경기도로 호칭함으로써 비로소 8도제가 확립되었다.183)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356∼357쪽.

 이상과 같이 경기도를 제외한 외방 7도의 도명이 그 도내 계수관 읍명의 첫자로 조합되자 그 뒤 도명을 구성하고 있던 계수관의 읍격 승강에 따라 도명의 변경이 잦았다. 풍해도가 黃海道로, 영길도가 咸吉 또는 永安 및 咸鏡道로 바뀐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대명외교의 관문인 평안도와 대왜관계의 초면인 경상도는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와 함께 반역사건과 綱常 죄인의 발생이 없지 않았으나, 대외 체면상 타도와는 다르게 8도 명칭이 확 정된 뒤 한번도 도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이처럼 경기도를 제외한 외방 7도 는 철저한 계수관 읍명 위주의 도명을 채택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의 5도양계 체제가 조선 초기의 8도체제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여말선초 계수관제의 치폐과정을 겪어야 했다. 고려 중기 이래로 도단위의 5도 양계가 구획되어 있었으나 실질적 지방행정의 중심단위는 계수관이었고, 그 예하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지방사회를 지배한 것은 토착 향리였다. 여말에는 중앙의 정치질서가 문란해지자 지방행정은 거의 계통과 체계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집권적인 양반관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토호적인 향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외관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유능한 수령인가의 여부는 주민의 휴척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수령에 대한 근무평가도 엄격히 행하고 그들의 비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찰사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존속된 계수관에 대한 정리도 단행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른바 1관 1직의 원칙에 의하여 직임의 기능적 분화를 꾀하게 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관료제가 마련되어 갔다. 그런데 계수관은 軍 民兼全의 직임을 지니고 있었으니 시대의 추이에 따라 당연히 그 분화가 추구되고 여기에 도의 감사와 각 군현의 행정권이 강화되면서 계수관의 행정적 기능은 소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군정의 기능만을 지니게 된 계수관은 국방체제가 강화되면서 순수한 군사조직으로 변모하여 갔다. 계수관을 바탕으로 지역단위의 방위체제인 軍翼道가 형성되고 군익도는 다시 세조조에 가서 鎭管體制로 개편되어 갔다.184) 李存熙,≪朝鮮時代地方行政制度硏究≫(-志社, 1990), 44∼72쪽.

 한편 道域의 개편과정을 살펴보면, 여말의 「科田京畿」의 원칙과 새 왕조의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짐에 따라 경기도역의 개편이 수반되었고 따라서 경기도와 접경한 다른 도역도 연쇄적으로 개편되었다. 공양왕 2년, 경기를 좌·우도로 나누어 長湍·臨江·兎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縣을 좌도, 開城·江陰·海豊·德水·牛峰을 우도로 하고 여기에 다시 경기권을 확장하여 양광도·교주도·황해도(서해도)의 일부를 좌·우도에 귀속시키는 한편, 좌·우도에 각각 도관찰출척사와 수령관(경력 또는 도사)을 두었다.

 태조 3년(1394) 한양에 천도한 다음에 다시 도역을 조정하여 平山·白川·谷山·遂安과 載寧·瑞興·新恩·俠溪는 수도의 남하에 따른 거리의 원격으로 황해도에 이속시키고 그 대신 양광도의 廣州·水原·楊根·雙阜·龍駒·處仁·利川·川寧·砥平은 경기도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광주·수원부 소관군현을 좌도, 楊州·富平·鐵原·延安府 소관 군현을 우도로 개편한 데 이어 태조 7년에는 충청도의 振威縣을 경기좌도에 이속시켰다. 태종 2년에는 경기 좌·우도를 합쳐 京畿左右道省이라 하고 관찰사와 도사를 두었다. 다시 동왕 13년에는 사방의 거리를 참작하여 연안·배천·우봉·강음·토산을 황해도에 이속시키고 伊川을 강원도에 귀속시킨 대신 충청도의 驪興·安城·陽智·陰竹과 강원도의 加平縣을 내속시킨 다음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그냥 경기도라 하여 수원에 감영을 두었다.

 경기도역의 개편에서 충청도 영역의 일부가 경기도에 편입되자 정종 원년(1399)에 영월을 강원도에 할속시키는 동시에 原州牧의 임내인 永春縣을 충청도에 이속시키고 태종 13년에는 여흥 등 5읍이 경기도로 이속됨에 따라 경상도 尙州牧 관내 沃川·黃澗·永同·靑山·報恩을 충청도에 귀속시켰다. 강원과 충청 양도가 영월과 영춘을 서로 교환한 것은 견아상입지를 정리하기 위한 조치이며, 태종 13년에 가평현을 경기도에, 동왕 16년에 함경도 소속의 甲山郡 西面과 閭延 등지를 평안도에 이속시킨 것도 같은 취지였다. 옥천 등 5읍이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간 것은 경기도역의 확장에 따른 연쇄반응이란 의미도 있었지만, 도계나 읍계의 구획에는 산천을 경계로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사실이 고려되었다. 즉 秋風嶺이라는 분수령을 경계로 하여 洛東江으로 유입되는 지역과 錦江으로 유입되는 지역을 양도의 분계점으로 했던 것이다.

 세종 16년(1434)에는 경기도 소속의 鐵原과 安峽이 강원도에, 충청도의 竹山縣이 경기도에 이속되었는데, 당시 철원은 봄·가을에 講武하는 곳으로 요역과 支供이라는 이중의 부담 때문에 피폐가 심하다 하여 병조가 이를 강원도에 이속시키고 그 대신 충청도의 죽산을 경기도에 이속시켰다. 이처럼 경기도역의 신축은 과전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세종은 강력한 과전억압책의 하나로 세종 13년에 新科田法을 제정함과 동시에 태종 17년, 하삼도에 이급하였던 경기사전의 1/3을 다시 경기도에 환급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여말부터 나타나는 감사의 직함에 도관찰출척사 다음에 ‘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 提調刑獄·兵馬公事’라는 여러 직능이 보여주듯이, 감사는 도내의 민생·풍속·수령의 치정 등을 순회 관찰하여 그 근무성적을 평가·출척하는 동시에 관내의 창고감독, 주민안집, 조세·공부의 수합·운송, 農桑 장려와 교화 등의 업무를 감독하고, 형옥과 군사문제는 왕 또는 중앙 정부에 품신하여 처리한다는 것이다. 사실 감사는 「一道之主」로서 도정을 총괄한다는 데서 이러한 장황한 직함은 의미가 없으므로 세종 5년에 삭제했다가 동왕 17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회군 이후 세조 12년 관제개혁 때까지 감사의 임용 기준과 직제 및 임기가 누차 개정되는 한편, 지방의 군사·행정·사법 및 수령 감독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감사와는 별도로 分臺·行臺監察 또는 敬差官·察訪 등을 수시로 각 도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세종 5년 12월에는 京外冗官을 도태시키기 위하여 각 도의 감사·兵馬節制使·水軍安撫使 및 감사의 수령관인 경력과 도사를 모두 경직으로 겸차하고 양계 감사는 종전대로 평양과 함흥부윤을 겸하고 병마절제사는 안주와 길주목사를 겸판케 하는 동시에 읍관 겸임자는 임기 2년에 솔권 부임토록 하였다. 이 때에 도태된 중외 용관이 총 69명에 녹봉 절약이 2,600여 석에 이르렀다. 한편 세종은 守令六期法 실시와 함께 경외관의 순환근무제를 활용하여 임기가 된 외관은 경관으로 입사시키고 아직 외관을 역임하지 않은 중견 경관을 각 도의 감사와 병사로 임명하였다.

 태종조에 이미 확립된 8도체제 위에서 감사의 선임·임기·겸수령직(감영 소재읍) 문제에 대한 논의와 함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세종은 즉위교서에서 감사의 임무가 막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사헌부에 명해 행대감찰을 8도에 특파하여 감사·수령의 賑濟勤慢을 염찰케 하였다. 세종은 부민고소금지법을 실시하는 동시에 주민의 寃抑을 해소하기 위하여 각종 감찰관을 각 도에 수시로 특파하여 외관의 탐학과 비행을 적발하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탐문하였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동왕 8년 8월에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감사도 중앙의 사헌부와 마찬가지로 관내 수령의 치정에 관하여 풍문 추핵을 허용케 하였다. 세종은 수령 6기법 실시와 함께 수령의 상급기관인 도제와 감사의 직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중신들과 의논하여 그 개선책을 모색하였다.

 8도체제 하에 있으면서도 조선 초기에는 이남 6도와 양계에 따라 감사의 직제와 임기가 상이한 데서 그 장단점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평안·함경 양도는 여진과 접경하여 반측이 무상하니 감사가 구임하지 않으면 변경을 효과적으로 진정, 복종시킬 수 없었으므로 重鎭에는 土官을 설치하고 2년 임기의 감사를 솔권 부임케하여 감영 소재읍의 부윤을 겸임시켰다. 이러한 양계의 감사는 「率眷兼尹」한 데서 일반 수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 풍헌과 출척의 기능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하여 세종 8년 대사헌 崔士康 등은 양계 감사의 솔권을 반대하였고, 좌사간 柳孟聞 등은 국가가 양계를 중시하여 임기 2년의 솔권 부임을 허용하고 있지만, 감사는 직책상 수령을 겸임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세종은 도에 따라 감사의 임기가 같지 않고 또 1년 임기는 너무 짧다 하여 2기(년) 내지 3기로 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려고 이조에 지시한 바 있다. 동왕 17년 9월에 지시를 받은 의정부가 이남 6도도 양계와 같이 2년 임기를 건의하자 세종은 거기에 따랐다. 그래서 17년 9월부터 20년 8월까지 8도 감사의 임기가 2년으로 계속되다가 다시 이조의 의견을 받아 들여 20년 9월부터는 종전대로 환원되었다. 양계 감사는 특수사정으로 인해 2년 임기가 적합하였지만, 이남 6도는 양계처럼 겸윤하지 않으니 순력 중 휴식할 곳이 마땅치 않고 항상 도내 제읍을 순시하니 유능한 수령인가 여부와 민생의 휴척을 1년 이내라도 두루 알 수 있으며, 또 감사는 대개 노장 관인이므로 2년간 跋涉巡行한다는 것은 실로 감당하기 어렵다하여 1년으로 다시 환원했던 것이다. 그 후 10년이 경과한 세종 30년 4월 다시 이조의 건의에 따라 6도 감사도 양계와 같이 감영소재 읍관을 겸임하되 임기는 모두(8도) 30朔으로 정하였다. 문종도 그 방침을 따랐으나 단종 2년에 가서 다시 종전대로 환원되고 말았다.

 감사의 소재 읍 또는 그 도의 본영을 감영이라 할 때, 그것은 감사가 솔권 겸윤하는 양계와 단신 도계하는 남부 6도와는 사정이 서로 달랐다. 양계의 감영인 평양과 함흥은 후기의 8도 감영처럼 동일한 기구와 시설을 갖추었지만, 남쪽의 6도는 단지 도정을 종합하는 중심지 내지 감사가 순력할 때 일시 휴식하는 곳으로 존재하였다.≪世宗實錄地理志≫각 도의 道總條에 의하면, 각 도의 감영 소재지를 「置司某地(邑名)」라 하였는데, 당시 8도의 감영 소재지는 다음과 같다.

경기도(수원, 뒤에 광주) 충청도(청주, 뒤에 공주) 전라도(전주) 경상도(경주, 뒤에 상주) 강원도(원주) 황해도(황주, 뒤에 해주) 평안도(평양) 함길도(함흥, 또는 영흥)

 위와 같이 각 도의 감영은 도내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또 서울에서 到界 지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임기 1년간 도내 제읍을 항상 순력해야 하는 6도 감영은 17세기 이후처럼 도의 중앙에 위치할 필요성이 적었다. 이는 조선시대 왕궁이 있는 서울을 중심으로 8도가 사방으로 藩屛해 있으면서 각 도에서 서울로 오는 것을 上京(서울로 올라간다)으로 표현했듯이, 8도의 감영도 도계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계수관에 위치하였다.

구분\도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영안 합계
監 營 소 재 읍 광주 청주 상주 전주 원주 해주 평양 함흥 8
監 司  (종 2)
都 事  (종 5)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8
8


府   尹
大都護府使
牧   使
都 護 府 使
郡   守
判   官
縣   令
縣   監
·
·
4
7
7
5
5
14
·
·
4
·
12
1
4
37
1
1
3
7
14
7
5
34
1
·
3
4
12
6
5
31
·
1
1
5
7
3
2
9
·
·
2
4
7
4
2
7
1
1
3
6
18
8
6
5
1
1
·
11
5
·
6
4
4
4
20
44
82
34
35
141

察   訪
驛   丞
3
3
3
3
5
6
3
3
2
2
2
1
2
·
3
·
23
18

敎   授
訓   導
11
26
4
50
12
55
8
49
7
19
6
18
11
31
13
9
72
257


1
1
2
1
3
1
3
2
1
1
1
1
2
1
3
1
16
9

<표 1>도별 감사이하 관원 통계

 조선 초기에 6도 감영은 「率眷兼尹 任期二年」의 양계 감영과 후기의 8도 감영과는 차원이 달랐다. 宣化堂·澄淸閣과 같은 상설 관아시설은 필요없었고 다만 감사가 도내 각읍을 순력하는 과정에서 물산이 풍성한 계수관이 主營 또는 留營으로 존재하면서 도내 각종 공사 집행의 중심지, 進上封上, 監試 및 도내 각종 公簿의 보관소(監庫)로서의 기능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조선 초기의 감사는 수령의 「到任」(임지에 도착)과는 다르게 그 道界에 발을 디디면 곧 해당 도의 감사로서의 직무가 시작되므로 감사의 부임을 到界라 하였다. 따라서 신구 감사의 교대는 수령처럼 관아에서 거행하지 않고 도계 지점에서 하였다.≪經國大典≫에 의거 8도체제가 정비된 뒤의 도 직제를 정리해 보면 앞의<표 1>과 같다.185) 조선 초기 감사의 관할 하에 있는 관원으로 이 표에 제외된 것으로는 경기도 麻田縣 소재 崇義殿官員, 諸陵參奉, 平壤府庶尹, 경상도의 倭學訓導, 황해·평안도의 譯學訓導, 경기도의 渡丞 및 양계지방의 重鎭에 설치되었던 土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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