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3. 군현제의 정비
  • 1) 속현의 주현화

1) 속현의 주현화

 조선 초기에도 고려 중기 이래 종래의 속군현에 설치했던 監務가 계속 파견되면서 속현의 主縣化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감무의 설치는 현종 9년(1018) 군현제 개혁 때 主邑에 배속되어 있던 속군현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예종 원년(1106) 이후 인종·명종을 거쳐 여말 및 조선 태종조까지 계속되었는데, 회군 이후 태종조까지 시기별 도별 감무의 설치를≪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면 다음의<표 2>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분\도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길 합계
공양왕대 5 3 21 3 2 2     36
태조∼태종 3 6 2 3 1 2 1   18
합 계 8 9 23 6 3 4 1   54

<표 2>도별 감무신설 일람표

 공양왕 2년(1390)이 되면 실질적인 집권세력은 이미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개국관료로서, 그들의 건의에 의하여 지방제도에 많은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양왕대에 36현, 선초의 태조·정종·태종대에 18현, 모두 54현에 신설한 감무는 동일한 배경에서 설치되었던 것이다. 즉 국가는 중앙집권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주읍에 소속된 많은 임내 가운데 우선 주현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속현이나, 주읍과 멀리 떨어져 있어 官府와의 왕래가 불편하고 향리의 횡포가 심한 속현부터 수령을 계속 증파함으로써 민폐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감무 신설은 반드시 국가적 내지 집권세력의 목적 달성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원의 간섭기 이래 선초까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임내가 주현으로 승격되어 감무가 설치된 곳도 많았는데, 이러한 경우는 호구 다소와 면적의 광협에 관계없이 다만 그 지방출신의 공로와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인해 승격되었던 것이다.

 여말까지 감무가 계속 신설됨으로써 주현이 될 만한 객관적 조건을 갖춘 속현에는 수령이 거의 설치되었다고 보이는데, 오히려 여말 선초에 이르면 주현과 임내를 막론하고 군소 현을 병합 또는 폐합하는 작업이 실시되고 있었으며, 또 1명의 감무가 여러 현을 겸임하는 곳도 있었다.

 이상과 같이 종래의 임내에 대한 감무의 계속적인 신설은 고려의 집권화 과정에서 본다면 특기할 만한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감무를 비롯한 수령직의 강화 및 외관의 품계와 임용 기준이 계속 상향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감무란 지방관이 새로 설치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 못지 않게 파견된 감무관이 과연 왕권의 대행자로서 부과된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고 관인으로서 거기에 상응한 권위를 가지고 관내를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우선 구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秩卑人微」한 감무가 수령으로 파견되는 데에 따른 민폐는 특히 고려 말기로 갈수록 심하였다. 이러한 폐단은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자 마침내 개혁되기 시작하여 창왕 즉위년(1388) 3월에는 조준의 건의대로 安集別監을 일체 폐지하고 다시 사류 출신의 朝官 6품 이상으로 현령·감무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參上官」(陞六)으로 승격된 감무는 태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동왕 3년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수령직 강화책이 대두되어 군현 명칭의 개정과 함께 감무를 「知縣事」 또는 「縣令」으로 제정할 것을 주장하는 논의가 있다가 마침내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를 크게 개혁할 때 비로소 현감으로 개정되었고 품계도 종6품으로서 고려의 7, 8품에 비하면 승격된 셈이다. 그런데 감무를 현감으로 개정한 것은 우선 비교적 큰 현에 두는 기존의 현령과 구별하고 「知郡事」와 마찬가지로 「監縣事」의 뜻을 따서 그렇게 개칭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조선 초기 종래의 속현에 대한 수령 파견의 배경은 두 가지 측면에 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중앙정부의 행정적·군사적 필요에서 설치하는 하향식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현지의 토성이민이나 해당 읍 출신 인사들의 요구에 의한 상향식이 있었다. 군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토호적 성격의 吏族은 외관의 설치로 인해 지위가 저하되고 권한이 축소되었지만 외관의 설치는 한편으로는 중앙정부가 그 군현을 우대한다는 은전의 표시로 간주되었고, 또 외관을 매개로 하여 중앙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데서 향리 자제들의 상경 從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관 설치는 속군현에서 주읍으로 승격되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속 주읍의 속박과 부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구획으로 중앙정부와 직결된다는 데서, 향리는 소속 읍의 간섭에서 떠나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일반 주민은 소속 읍의 부당한 처우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임내의 주읍화가 단순히 중앙집권화를 기하고 향리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재지세력 진출과 지역주민의 처우개선이란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186) 李樹健,<朝鮮初期 郡縣制 整備에 대하여>(≪嶺南史學≫1,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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