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3. 군현제의 정비
  • 2) 임내의 정리
  • (2) 향·소·부곡의 정리

(2) 향·소·부곡의 정리

 鄕·所·部油·處·莊도 군현과 같이 일정한 구역과 주민을 가진 구획으로 존재하였다. 태조 2년 4월 鷄龍山 新都를 정할 때 경기에 소속된 주현과 부곡·향·소가 무릇 81개나 되었다 하니,187)≪太祖實錄≫권3, 태조 2년 4월 을사. 이 때의 향·소·부곡은 주현 보다 하급의 행정구획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향·소 부곡의 정리과정도 상술한 속현과 마찬가지로 주로 주현 또는 속현으로 승격되는 경우, 소속이 변동되는 경우, 혁파되어 직촌화하는 경우 등 세 가지가 있었다.

 향·소·부곡이 주현으로 승격될 때 하나의 향이나 소 또는 부곡이 단독으로 주읍이 되는 예는 극히 드물고, 수개 이상의 향·소·부곡이나 촌이 합쳐 하나의 주현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며 대체로 주현보다는 속현으로 승격되는 것이 많았다. 속현이 주현으로 승격된 예는 많은 반면, 향·소·부곡은 승격된다 하여도 겨우 속현에 머물고 있다는 데서 그들은 원래 규모가 영세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호구와 면적이 하나의 주현으로 존속하기에는 너무나 영세하였기 때문에 속현 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향·소·부곡의 이속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쳐 광범하게 실시되었는데, 속현과 마찬가지로 어떤 주읍을 보강한다든지, 군현의 등급을 승격시키기 위하여, 혹은 견아상입지나 월경지 등 군현의 구역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지역단위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이속할 때에 분할하거나 그 명칭이 소멸되진 않고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것들도 속현과 같이 주나 부와 같은 대읍에 많고 소현에는 대체로 적었다. 향·소·부곡에서는 토성이민이 속현처럼 완강하지 못하여 귀속문제에 있어서도 주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고 국가의 일방적인 조치에 따라 이속되거나 주위의 열읍이 다투어 차지하려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향·소·부곡의 혁파도 속현과 동일한 과정을 밟았다고 생각되나 속현보다는 그 시기가 훨씬 앞서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며, 소멸 내지 정리과정에 있어서도 지역에 따라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벌써 태종 9년에 속현과 함께 향·소·부곡이 모두 혁파되었으나 기타 도는 아직 많이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世宗實錄地理志≫소재 향·소·부곡 가운데 대다수는 전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실제로는 이미 소멸하여 직촌이 되었거나 또는 혁파과정에 놓여 있었다.

 고려 후기까지는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분포해 있었던 전대의 향·소·부 곡·처·장이 조선 초기에 걸쳐 거의 임내로서의 자격이 상실되고≪세종실록지리지≫상에는 불과 82개만이 존속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계속 소멸의 길을 걸어 성종 12년(1481) 경에 가서는 12개의 부곡·향·소만이≪신증동국여지승람≫의 속현조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는 고적조에 수록될 정도로 모두 소멸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향·소·부곡은 속현과는 달리 벌써 고려 후기부터 주민의 신분적인 해방과 함께 격심한 北虜·南倭의 침략으로 인한 지역적인 이동이 심하였고 구역도 위축되어 특수한 것을 제외하면 그 규모는 대개 1개 면이나 촌과 비슷하였다. 심지어 어떤 것은 주민은 없고 지역만 있는가 하면 주민이 있어도 2호 내지 4호밖에 되지 않는 극히 영세한 형세를 지니고 있어 국가의 임내 정비책에 대해 조직적인 반대를 하거나 어떤 방해 요인은 없었으나, 이들을 중간에 놓고 부근 군현이 서로 다투어 차지하려는 데서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이와 같이 그들의 규모가 영세하였으므로 종래 그 곳을 지배하던 長吏들도 대개 그들의 기반을 상실하고 다른 지방으로 유망해 갔던 것이며 혁파될 때는 폐합되는 주읍에 흡수되었거나 부근 군현에 분속되기도 하였다.

 향·소·부곡의 원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신증동국여지승람≫편찬자의 말처럼 “신라시대 군현을 설치하면서 고을의 최소 단위인 현이 될 수 없는 곳에 향 또는 부곡을 두어 각기 소재 읍에 소속시켰다”188)≪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道 驪州牧 古跡.하니 향·부곡이 우선 현보다 영세하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편 향·소·부곡이 형성된 이래 장구한 세월이 경과하면서 변천이 빈번했기 때문에 15세기의 자료를 가지고 원래 모습을 구명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조선 초기에 이르면 그들의 규모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1개면이나 1개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계자료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그러니 종래의 향·소·부곡은 15세기에 와서 대개 면 또는 리·촌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며,≪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각 읍 속현조에 기재된 11개 부곡, 1개의 향과 소는 호칭은 비록 향·소·부곡이나 실질적으로는 속현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의 문헌에 「縣」으로 표기된 적도 있으며 그 위치는 대개 소속 읍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월경지로 또는 견아상입지로 존재하였다는 것이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이것이 또한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에서 즉시 정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잔존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상기 13개의 부곡·향·소는 속현과 함께 소속 주읍의 관내에 독자적인 구역으로 16세기 초까지 존속하다가 그 이후 점차 면으로 개편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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