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4. 행정구역과 행정체계
  • 1) 행정구역
  • (1) 도역과 군현 및 면·리 편성

(1) 도역과 군현 및 면·리 편성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태종조에 8도체제가 확립된 뒤 각 도역의 변동은 크지 않았다. 각 도계는 신라시대의 9주, 고려시대의 12목 혹은 10도 등의 구획을 바탕으로 하여 점차 5도양계 체제로 도역이 정해지게 되었으며, 특히 5도 지역은 각 도내 계수관의 읍명을 조합한 도명이 정착되면서 도역도 각 계수관의 영속관계에 있는 군현 분포를 고려하여 조정되어 갔다. 여기에는 왕조교체에 따른 수도의 이전, 과전법의 실시에 따른 도역의 재조정 및 산천 지세와 같은 보다 합리적인 기준 등이 참고되었는가 하면 또한 역사적인 전통도 중시하였다. 조선 초기 8도의 편성도 고려 이래의 기존 편제를 존중하였고 도역의 개편에는 읍계의 재조정에 따른 토성이민 간의 분쟁과 같은 문제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태종조 8도체제의 정비에는 군현제 정비에 따른 분쟁과 같은 사례는 별로 없었고 당시에 편성된 각 도역 이나 도계도 중간에 큰 변동없이 한말까지 존속되었다.

 태종조에 확립된 8도체제는 그 내용이≪세종실록지리지≫에 담겨져 있으므로 여기에 의거, 각 도역의 편성과 그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도인 漢城府와 옛 수도인 開城府는 지방의 행정구획인 8도와는 별도로 경관직으로 하였다. 한성부의 행정체계는 고려시대 개성부의 예를 따른 것으로 관아의 서열은 6조의 다음이 된다. 그 관장사무는 수도 일원의 지역행정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일부의 전국적인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니, 첫째 호적 사무로서 3년마다 등록하는 호적을 관리 보관하며, 둘째 소송 일부의 판결 사무로서 토지·가옥 및 산 등의 재산관계 송사는 여기서 처리한다. 성내와 성저 10리로 구획되어 성내는 5部를 두고 각 부는 坊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동부는 12방, 남부는 11방, 서부는 8방, 북부는 10방, 중부는 8방이며, 성저 10리는 동으로 양주의 松溪院 및 大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楊花渡와 高陽의 德水院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한강 및 露梁渡에 이른다. 태조 초에는 판사 2명을 두었으나 예종 원년(1469)에 이르러 판사를 판윤(정2품)으로 고치고 그 밑에 우윤(종2)·서윤(종4)·판관(종5) 등을 두었다.

 옛 수도인 개성부는 한양으로 천도 후에는 留後司로 삼아 留後·副留後·斷事官·經歷·都事 각 1원을 두고 개성의 외곽지역을 관장했던 개성현령은 폐지시켰다. 사방 계역은 동쪽으로 松林縣의 板積川까지 15리, 서쪽으로 碧瀾渡까지 30리, 남으로 海豊郡의 朽介石까지 25리, 북으로 王興出洞까지 31리의 거리였다. 이 개성부는 조선 후기에 강화·수원·광주와 더불어 4都의 留守府로 개편되었다.

 경기도는 앞 2절에서 이미 기술한 대로 태종 13년에 도역을 조정하여 연안·배천·우봉·강음·토산을 황해도로, 이천을 강원도로 환속케 하는 한편, 충청도로부터 여흥·안성·양성·음죽과, 강원도로부터 가평현을 경기도에 편입케 하였다. 세종대에는 철원과 안협을 강원도에 환속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두었다. 사방 경계를 보면 동으로는 강원도의 춘천과 원주에 이르고, 서로는 황해도의 강음과 배천에 이르며, 남으로는 충청도의 죽산과 직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황해도의 토산과 강원도의 이천에 이르러, 동서의 거리가 964리, 남북이 364리가 되며, 소관 군현수는 목 1, 도호부 8, 군 6, 현 26이었다.

 충청도는 태종 13년 도역이 조정된 뒤에는 한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도명은 도를 구성하고 있던 계수관(忠·淸·公·洪州)의 읍격 승강에 따라 忠淸·公淸·公洪·忠洪道 등으로 개칭이 빈번하였다. 도의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丹陽縣의 竹嶺에 이르고, 서로는 泰安의 朽斤伊浦에 이르며, 남으로는恩津縣의 鵲旨에 이르고, 북은 稷山의 牙州梯에 이른다. 동서의 거리는 477리, 남북이 244리이며, 소관 읍수는 목 4, 군 11, 현령 1, 현감 39읍이었다. 감영은 국초에는 청주에 있다가 선조 31년(1598)에 공주로 옮겼다.

 경상도는 태종 13년 도역이 개편된 이래 한말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도는 타도에 비해 地廣民稠하다는 이유로 도역의 중앙을 관류하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좌·우도로 분도해야 한다는 논의가 국초부터 있어 왔다. 그래서 중종 14년(1519)에는 도역을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로 하고 각각 감사를 두었으나 곧 환원되었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도로가 불통되자 다시 나누어 좌도는 경주, 우도는 상주에 설치하였다가 그 다음해에 다시 합하여 성주의 八莒(漆谷)縣에 감영을 두었다. 동왕 28년에 또 나누었다가 이듬해에 환원하여 감영을 달성(대구)에, 32년에는 안동에, 34년에는 다시 대구에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와 접해있고 서는 지리산 또는 減陰縣의 六十峴에 이르며, 북으로는 죽령 및 문경현의 草岾(조령)에 이르고, 동서의 거리는 376리, 남북이 448리가 되며, 소관 읍수로는 부윤 1, 대도호부 1, 목 3, 도호부 6, 군 15, 현령 6, 현감 34읍이었다.

 전라도는 고려시대 도역이 확정된 이래 한말까지 거의 변동이 없었다. 감영도 전주에 설치된 이래 변동이 없었으나 도명은 계수관(全·羅·光州·南原 등)의 읍격 승강에 따라 全羅·全南·光南·全光道로 잠깐씩 개칭된 일이 있었다.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경상도 咸陽郡에 이르고, 서쪽·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하며, 북으로는 충청도 恩津縣에 이르러, 동서의 거리가 233리, 남북이 406리이며, 소관 읍수로는 부윤 1, 목 2, 도호부 4, 군 12, 현이 39읍이었다.

 강원도는 태조 초에 종전의 交州江陵道에서 현재의 도명으로 바뀐 뒤 세종 18년(1436)까지 도역의 조정을 거치고 나서는 한말까지 변동이 없었다.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줄곧 바다와 접하고, 서로는 경기도의 가평현에 이르며, 남으로는 충청도의 永春縣에, 북으로는 鐵嶺에 이르러, 동서의 거리가 250리, 남북의 거리가 558리였다. 소관 읍수로는 대도호부 1, 목 1, 도호부 3, 군 7, 현 11읍이었다.

 황해도는 종래의 서해·풍해도의 도명 변경과 함께 태종조까지 도역의 조정이 있은 뒤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도의 경계는 동으로는 경기도 朔寧縣의 薍田에, 서로는 豊川의 業淸江에, 남으로는 康翎의 九月峰 바닷가에, 북으로는 中和縣의 馬兒에 이르러, 동서의 거리가 426리, 남북이 235리이며, 소관 읍수로는 목 2, 도호부 3, 군 7, 현 12읍이었다.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으로 연혁이 복잡하였다. 국초부터 연변지역에 설치했던 종래의 진을 주·현으로 개편하는 한편 4군지역을 개척하였으나 세조 초에 폐지하였다. 태종 14년 평안도로 고친 다음 본래 永吉道(함경도)域인 갑산 서쪽 閭延 등지를 이 도에 편입시켰다. 도의 경계는 동으로 함경도 高原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접하며, 남으로는 黃州에, 북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러 동서의 거리가 323리, 남북이 423리였으며, 소관 읍수는 부윤 1, 대도호부.1, 목 3, 도호부 5, 군 21, 현 14읍이었다. 함경도는 여말 선초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라 도역의 신축이 반복되기도 하였다. 태조는 그 고조 李安社(穆祖)의 묘가 孔州(慶興부근)에 있었으므로 동 2년에 이곳과 甲州에 성을 쌓고, 7년에 공주를 慶源府로 하는 등 두만강 방면에까지 경략의 손을 뻗쳐 그 중간지점인 亏籠耳(현 鏡城)에 만호진을 두고 그 관하에 石幕城(현 富寧)을 쌓았으나, 태종 10년에 여진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여 목조묘를 함흥으로 이장하고 府를 鍾城으로 옮겼다. 그 뒤 세종 16년부터 북진을 재개하여 31년까지 6진을 두어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판도 안에 넣게 되었다. 태종 13년 도명이 동북면에서 永吉道로 개정된 뒤 咸吉·永安·咸鏡道로 누차 바뀌었고 감영도 함흥에서 영흥으로, 다시 함흥으로 옮기는 변동이 있었다. 도의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길게 바다와 접하고, 서로는 황해·평안도와 접경하며, 남으로는 철령에 이르고, 북은 두만강과 접경하여, 남북의 거리가 1,000여 리나 되며 동서는 광협이 한결같지 않아 수백여 리 또는 6, 70리가 되기도 하였다. 소관 읍수로는 부윤 1, 대도호부 1, 목 1, 도호부 4, 군 7, 현 1읍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거한 조선 초기의 각 도별 도세는 다음<표 6>과 같다.201) 이 표에서 主邑·屬縣·廢縣·鄕所部曲·驛院數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戶數·人口數·田結數는≪世宗實錄地理志≫에 의거하여 각각 통계하였다. 경기도의 호구와 전결수에는 한성부와 개성부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소재 호구수와 전결수는 각 도의 道總과 各官(邑)별 통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또 戶와 口라는 의미도 후기의 호수·인구수와는 성질이 전혀 다르다.

 아래 표의 각종통계는 바로 조선 초기 각도의 형세를 말해주고 있다. 여말선초에는 北虜南倭로 인해 남북간 또는 해륙간 인구의 이동이 격심했으며 각 도의 형세는 시기에 따라 융성과 쇠잔이 일정하지 않았다. 대체로 국초에는 왜구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양계와 중부 내륙지방에 인구의 충실을 가져 왔고 삼남의 연해지방에는 반대로 인구의 유출이 많았다. 세종조부터 밖으로는 왜구가 종식되고 안으로는 정치·사회적 안정과 함께 주민 안집과 적극적인 권농정책으로 삼남지방에 인구의 유입이 많은 대신 강원도와 서북지방은 인구의 유출로 인해 점차 피폐해 갔다. 즉 전란 중에 피난의 목적으로 유리했던 인민이 각기 고토로 귀환하고 때마침 흉황이 계속되자 농업 생산성이 높은 연해 평야지대로 유리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對明·對女眞 관계와 국경방비 등으로 인한 주민의 과중한 부담은 특히 양계와 황해도지방 주민의 유망을 촉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항목\도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합 계
州 府 郡 縣 數
屬 縣·廢 縣
鄕所部曲處莊數
驛 / 院 數
戶 數
人 口(男丁數)
田 結 數
37
23
54
54/114
45,339
164,073
207,814
54
20
162
71/213
24,170
100,790
236,114
66
63
268
158/474
42,227
173,759
261,615
59
67
221
60/261
24,073
94,248
264,268
26
20
50
82/67
11,084
29,009
65,908
24
5
22
31/78
23,511
71,897
223,880
42
2
9
31/91
41,167
105,444
311,650
22
13
·
54/47
14,739
66,978
151,488
330
213
804
549/1,355
226,310
806,198
1,722,737

<표 6>각도별 도세 일람

 조선왕조는 전국을 8도로 구획한 다음 각 도를 다시 동·서도, 남·북도 또는 좌·우도로 구분하고 거기에 관내 군현을 배속시켰는테, 이를 도별·읍격별로 정리하면<표 7>과 같다.202) 이 표는≪經國大典≫에 의거하되 조선 후기에 가서 변동된 군현은 후기의 자료에 의거하였으며, 李相佰의≪韓國史-近世前期篇≫(震檀學會, 1962), 186∼187쪽의 표를 참고하여 재작성한 것이다.

  수령
주부
  군현
도별
부윤
(종2)
대도호
부 사
(정3)
목사
(정3)
도호부사
(종3)
군 수
(종4)
현령
(종5)
현 감
(종6)
비 고




左道
(21)
    廣州
驪州
富平·南陽·
利川·仁川·
水原
楊根·案山·
安城
龍仁
振威
陽川
金浦
砥平·果川·陰竹·
陽城·陽智·衿川·
通津
광주는 선조 10년에
부윤, 정조 19년에
유수. 수원은
정조 17년에 유수.
右道
(17)
開城
(유수)
  坡州
楊州
江華·長湍 朔寧·豊德·
麻田·高陽
永平 抱川·積城·漣川·
喬桐·交河·加平·
竹山
강화는 광해 10년에
부윤, 인조는 5년에
유수. 개성은
세종 20년에 유수.






左道
(20)
    忠州
淸州
  丹陽·天安·
文義·槐山·
沃川·淸風
文義 堤川·稷山·懷人·
延豊·陰城·淸安·
鎭川·木川·永春·
永同·黃澗·靑山·
報恩
 
右道
(33)
    公州
洪州
  林川·泰安·
韓山·舒川·
沔川·瑞山·
溫陽
  鴻山·平澤·定山·
靑陽·恩津·懷德·
鎭岑·連山·魯城·
扶餘·石城·庇仁·
藍浦·結城·保寧·
海美·唐津·新昌·
禮山·全義·燕岐·
牙山·大興·德山
尼山縣은 노성으로
개칭.






左道
(40)
慶州 安東   大丘·靑松·
寧海·密陽·
順興·漆谷
淸道·永川·
醴泉·榮川·
興海·蔚山·
梁山·豊基
盈德
慶山
東萊
義城
河陽·龍宮·奉化·
淸河·彦陽·眞寶·
玄風·軍威·比安·
義興·新寧·禮安·
迎日·長鬐·靈山·
仁同·昌寧·機張·
慈仁·英陽
순흥부는 세조 3년에
폐읍, 숙종 9년 복설.
칠곡부는 인조 18년,
자인현은 인조 15년
에, 영양현은 숙종 2
년에 각각 신설
右道
(31)
    尙州
星州
晋州
昌原·金海·
善山
陜川·咸陽·
草溪·咸安·
金山·昆陽
固城
巨濟
南海
開寧·居昌·三嘉
·漆原·鎭海·河東·
宜寧·聞慶·咸昌·
知禮·安陰·高靈·
山陰·丹城·泗川·
熊川
안음은 안의현으로,
산음은 山淸縣으로
개칭.






左道
(24)
    光州 南原·長興·
順天·潭陽
寶城·樂安·
淳昌
昌平
龍潭
綾城
光陽·玉果·南平·
求禮·谷城·雲峰·
任實·長水·茂朱·
鎭安·同福·和順·
興陽
능성현은 綾州牧
으로 승격.
右道
(32)
全州   羅州
濟州
  益山·古阜·
靈岩·靈光·
珍島·錦山·
珍山·金堤·
礪山
臨陂
萬頃
金溝
龍安·咸悅·扶安·
咸平·康津·高山·
泰仁·沃溝·興德·
井邑·高敞·茂長·
長城·務安·海南·
大靜·旌義
珍原縣은 선조 33년
에 장성에 편입.


嶺東
(9)
  江陵   襄陽·三陟 平海·通川·
高城·杆城
蔚珍
歙谷
   
嶺西
(17)
    原州 淮陽·春川·
鐵原
旌善·寧越·
平昌
金城 平康·伊川·金化·
狼川·洪川·楊口·
麟蹄·橫城·安峽
 




左道
(14)
    黃州 平山·瑞興 鳳山·谷山·
安岳·載寧·
遂安·信訓·金川
新溪
文化
兎山·長淵 牛峰縣과 江陰縣을
효종 3년에 병합,
금천군 신설.
右道
(9)
    海州 延安·豊川 白川 瓮津 長連·松禾·康翎·
殷栗
 








西道
(21)
平壤   安州
定州
義州
昌城·朔州·
肅川·龜城
嘉山·郭山·
中和·宣川·
鐵山·龍川
龍岡
永柔
甑山
順安
江西
三和
咸從
   
東道
(21)
  寧邊   江界·成川 祥原·德川·
价川·順川·
熙川·碧潼·
雲山·博川·
渭原·寧遠·
慈山·楚山
三登 陽德·孟山·泰川·
江東·殷山
理山이 초산으로
개칭.




南道
(15)
咸興 永興
安邊
  北靑·德原·
定平·甲山·
長津·厚州
文川·高原·
三水·端川
  洪原·利城 장진부는 정조 11년,
후주부는 순조 13년
에 각각 신설.
北道
(10)
    吉州 鏡城·慶源·
會寧·鍾城·
穩城·慶興·
富寧·茂山
    明川 무산부는 숙종 10년
신설.

<표 7>各道別 州·府·郡·縣의 편성표

( )는 고을수

 조선시대를 통하여 전체 군현 330여 읍 가운데 군 이상은 그 나름의 읍세를 가졌으나 현감이 파견되는 140 내외의 소현은 읍세상 하나의 큰 면에 불과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여 주읍과 별도로 호구·전결수가 기재된 속현과 대읍 및 중소 군현의 읍세를 대비해 보면 그 격차가 매우 심하였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10배 내지 20배가 나는 곳도 있었다.

 군현 구역의 내부구조와 그 개편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任內의 직촌화와 면리제의 확립과정이 밝혀져야 한다. 임내는 보통 혁파되기 전의 속군현과 향·소·부곡·처·장 등을 지칭하였다. 또 주읍의 관할 구역내, 즉 관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속군현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임내는 아직 직촌화되지 않고 주읍 관내에 독자적인 구역을 보유하면서 그 곳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현리나 장리를 통하여 주읍과의 관계를 맺었다.

 직촌이란 중간에 임내의 통치기구인 縣司(鄕·部曲司) 또는 현리·장리를 매개하지 않고 수령의 직접 통치 하에 있는 주읍의 직할촌이다. 즉 직촌은 어디까지나 임내를 전제로 한, 임내에 대한 대칭어이다. 따라서 직촌은 일정한 시기에 국한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고 임내가 존재했던 시기에 임내와 함께 존재하였고 또 임내가 혁파되는 과정에서 계속 생기고 있었다. 그런데 직촌이란 용어의 사용시기는 임내가 본격적으로 정비되던 여말 선초이며 그 용어가 나오는 문헌도 이 시기에 편찬된≪고려사지리지≫,≪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지와 15세기의 실록에 국한된다.

 여말 선초에 집중적으로 사용하던 직촌은 「임내의 혁파와 면리제의 실시」 사이에 과도기적으로 존재했던 촌락을 의미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 존재했던 직촌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시대적 변천과정에서 촌의 유래와 성격을 다음의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군현의 구성요소로서의 촌, 둘째는 주읍의 관내에서 임내와 병렬해 있던 독립촌, 셋째 임내의 소멸과정에서 생기는 직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셋째의 유형에 해당하는 직촌이 바로 여말 선초에 임내의 소멸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역사적 용어로서의 직촌은 바로 이 유형에 속하는 것을 지칭하였다. 이들 직촌의 명칭은 종전의 임내 명칭을 보유한 채 점차 면리제로 개편되어 갔다. 혁파된 임내는 직촌이 됨과 동시에 그 규모에 따라 면 또는 리·동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촌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①조선시대의 「面」과 같은 지역촌으로서의 촌이 있고, ② 자연촌으로서의 촌, 이는 신라이래 통시대적으로 존재하였으며 또 조선시대의 리 또는 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③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東村」·「南村」 등의 용례가 있는데, 이는 바로 읍치를 중심으로 「東面」·「南面」 등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니 이런 의미의 촌은 도면과 함께 동일한 추세로 발전하였다. 고려 초기의 도가 轉運·巡察의 구획으로 사용되어 점차 명실상부한 군현의 상급 행정구획으로 확정되어 나갔듯이, 촌과 면도 처음에는 단순히 읍치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데 불과했으나 점차 방위명을 버리고 고유명을 띠면서 지역촌으로 발전하거나 조선시대의 리·동의 상급행정구역으로서의 면으로 발전하였다. 면리제가 확립된 뒤에는 군현의 구역이 크게 읍치·면·리(동)로 편성되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읍치·직촌·임내로 구성되어 있었다.203) 李樹健, 앞의 글(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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