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5. 지방자치적 기구
  • 1) 경재소와 유향소

1) 경재소와 유향소

 京在所는 留鄕所와 함께 고려의 事審官制에서 분화 발전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14세기 말 왕조 교체기에 새 왕조를 창건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신흥사대부 세력이 이제까지 군현의 지배권을 갖고 있던 향리를 배제하고 재경관인과 연결된 재지사족 주도의 지방통치와 성리학적 향촌사회를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양자가 거의 동시에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설치 운영되었다. 경재소와 유향소는 그 구성원이나 소재지 및 기능상으로 볼 때 별개의 기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어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다.

 경재소란 용어는 벌써 공양왕 2∼3년의 국보호적에 나타남을 보아, 고려의 사심관제가 여말에 이르러 사족이 크게 재경관인과 유향품관(또는 토성품관)으로 분화되는 추세가 급진전되자, 각기 재경·재향 세력별로 경재소와 유향소가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215)≪成宗實錄≫권 137, 성종 13년 정월 신유.

 이러한 경재소의 조직과 임원 및 직무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은 세종 17년(1435)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216)≪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9월 기사. 즉 군현토성에서 상경 종사한 재경관료로서 본관, 부·모·처의 내·외향 등 연고가 있는 주·부·군·현 중에서 혈연적 또는 지연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보는 이른바 「八祖戶口法」에 의한 8개 향(읍)을 최대범위로 한 경재소의 조직 범위로 정하였는데, 관품에 따라 최고 8개 향에서 최하 2개 향(읍)의 경재소를 맡게 되었다. 이는 바로 고려의 사심관 조직과 비슷한 것이며, 경재소마다 좌수 1명, 참상(6품 이상)·참하(7품 이하) 별감 각 2명씩 모두 5명의 임원을 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경재소는 사심관에 비해 재경관인들의 참가 읍수가 확대된 셈이다. 유향소의 임원은 주·부·군·현이란 읍격에 따라 임원의 정원이 다른데 경재소는 관계자료의 결여로 그 상세한 정원은 알 수 없다. 경중 각사마다 당상과 낭청이 있듯이 경재소 임원에는 당상·좌수·별감이 있었다. 당상은 그야말로 당상관이 선임되고 별감은 당상이나 좌수보다 관직이 낮은 자가 선임되었다.

 경재소는 사심관제의 변형으로 충숙왕 5년(1318)에 사심관제가 공식적으로 혁파된 후에도 비법제적인 임의의 조직체로서 군현에 따라 잔존하다가 새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확대 재조직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군현의 형세와 상경 從仕勢의 융성·쇠잔에 따라 조직 시기의 더딤과 빠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개국 초에 외방거주 품관과 한량을 상경 시위케 한 조치는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른바 「强根弱枝策」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한편 국가는 재경관인으로 하여금 제각기 연고지에 따라 경재소를 조직케 하고 그것을 통해 지방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재경관인들은 경재소와 유향소를 발판으로 각기 연고지의 지방행정은 물론, 자기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도 부식해 갔던 것이다. 제주와 양계지방의 重鎭에 「土官」을 설치하여 토착세력을 기미 내지 회유했듯이, 경재소의 운용도 처음에는 이러한 지역부터 국가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세종은 제주와 양계의 신설 중진에 대하여는 경재소를 통한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바라마지 않았다. 세종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각 도 제읍의 유향소를 분장시킨데 이어 동왕 20년에는 신설진인 경원·회령·경흥·종성에, 동 29년에는 온성에, 대군·왕자들로 하여금 각기 경재소를 관장케 하였다. 사실 함경도는 조선왕조의 「興王之地」 또는 왕실의 친척이 사는 豊沛鄕으로 간주되어 개국 초부터 국가는 이 지방 경략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양계지방에 대한 회유책은 이남 6도와는 달랐다. 가령 국초 이래 호구성적·군적작성·양전사업과 같은 집권책과 수취체제의 정비문제는 으례 유예되어 왔으며, 현지의 토호 자제를 서울에 초치하여 거경 시위하게 한 다음 벼슬을 주고 또 중진에는 토관을 설치하여 재지세력을 회유 무마한다든지, 왕자들로 하여금 각 읍의 경재소를 분장케 하는 일련의 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신설 주전의 제반 규모를 마땅히 남부 군현과는 달리 해야 한다면서 6진 자제 가운데 재간이 있는 자를 선발, 상경 종사시키고 왕자들로 하여금 각기 경재소를 관장하도록 하면, 이곳이 영구히 북방의 藩屛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경재소는 각기 소관 군현의 유향소와 긴밀한 종적 유대를 가지고 유향소 임원의 임면권, 향리규찰, 향중인사의 천거와 보증, 향풍교화, 공부·진상의 독촉, 경저리 사역, 貢物防納 및 소관 군현의 요구사항의 건의 등 실로 광범한 활동을 하였다. 법제상 수령의 치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 하였지만 실제는 소관 군현의 공무에 대하여 수령에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경재소는 15세기 초 군현구획의 개편, 임내의 이속, 읍격의 승강, 읍치의 이전, 군현의 병합문제 등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217)金聲均,<京在所의 性格에 對한 一考>(≪亞細亞學報≫1, 1965).
金龍德,≪鄕廳硏究≫(韓國硏究院, 1979).
周藤吉之,<鮮初における京在所と留鄕所とに就いて>(≪加藤博士記念東洋史集說≫, 1937).

 각 읍의 경재소에는 당상·좌수·별감 등의 임원이 있었다. 참가자격은 본관·출신지·외향·처향 등 8향 외에도 祖先墳墓 소재읍·수령 임지도 가능했던 것이며, 본인의 자천 또는 현임자의 추천이나 권고에 의하여 선임되었다. 경재소 임원은 관할유향소 임원의 임명권을 가지며, 향리규찰과 인재 천거 및 향중인사들로부터 갖가지 청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경재소는 자체 일정한 예산을 갖고 경조비, 감사·수령의 전송연, 방문객 접대비 등에 충당하였는데, 그 예산은 해당 읍의 유향소나 京邸에서 공급되었다. 유향소는 경재소에 歲饌·節饌과 같은 일정한 예물을 보내왔다. 경재소 임원은 부모상을 당하거나 외관으로 서울을 떠나게 되면 사임하였다.

 경재소는 재경세력 또는 관권 주도의 지방 통치체제를 확립하려는 조선 초기에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재지사족 중심으로 조직된 유향소 는 15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한 데 반하여 경재소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그러한 과정을 밟지 않았다. 지방에서 상경 종사한 뒤에는 그들은 각 지방에 산재한 소유 토지와 노비 또는 출신지 소재 토지와 노비를 지배해 왔는데, 바로 경재소가 그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재경관인들은 혈연과 지연, 인맥과 학연 또는 동료적 연결에서 각각 소유 토지·노비의 소재지 외관들과 연락하여 외지 농장의 관리와 외거노비의 추세와 수공에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재경관인이나 재지사족을 막론하고 그들의 2대 재산인 토지와 노비가 크게 父邊·母邊·妻邊 및 祖母·曾祖母·外祖母邊 등으로부터 전래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재소도 재경관인들의 그러한 연고지(8향)별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재소가 바로 재경관인들로 하여금 서울에 살면서도 전국 각지에 산재한 토지와 노비를 지배하여 그들로부터 收租·收貢(노비신공)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특히 16세기 이래 노비의 도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사족들의 도망노비 추쇄문제는 그 읍 수령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였다. 성종조 李深源의 상소에 보이듯이, 재경관인들과 외관의 청탁은 경재소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218)≪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

 경재소에 의해 임명된 유향소는 군현 지배권을 향리로부터 회수하기 위해서 경재소의 힘을 빌렸던 것이며, 재경관인들은 각기 경재소를 발판으로 하여 그 읍 수령과 유향소에 직접·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연고지의 지방행정은 물론, 자기들의 경제적 기반도 부식해 갔던 것이다.

 유향소는 여말 선초 신분제의 재편성과정에서 이른바 토성품관·유향품관 이 각 읍마다 존재하게 되었고, 군현 내지 향읍 지배세력이 향리에서 재지 사족으로 점차 대체되는 과정에서 서울의 경재소와 함께 유향소가 자발적으로 조직·운영되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재지사족의 번성과 쇠잔 여부에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재지사족이 일찍이 형성된 대읍·웅부는 벌써 여말부터 설치된 것같으나 그렇지 못한 소현과 벽읍은 15세기에 들어와서 조직되었다.

 재지사족은 이른바 「토성품관」·「유향품관」이라 불리우는 부류들로서 여말에 남발되었던 첨설직을 받아 이족에서 유향품관으로 성장한 부류 또는 왕조교체와 세조찬탈 때 낙향한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어 유향소를 설치·운영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왕조의 진전에 따라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확립하고 새 농법을 적용, 지역개발을 활발히 추진하는 데서 그들의 정치·사회적 세력도 신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유향소를 발판으로 한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에 대한 신장추세는 결국 세조의 전제정치와 관권 중심의 중앙집권화와 충돌하여 세조 13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유향소 혁파에 관한 기사는≪세조실록≫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성종 13년부터 유향소 복설운동이 전개되면서 朝臣들의 진언 중에서 세조조의 유향소 혁파 사실이 밝혀졌다. 세조 13년 유향소 혁파 경위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설이 있다. 하나는 함경도 각 관의 유향품관들이 李施愛의 반란에 가담하여 수령들을 擅殺하였으므로 혁파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李克培의 말에 근거한 것으로 세조 말년 충주민이 수령을 고소하려 할 때 유향소에서 수령을 고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여 사람들을 침학하였는데 이 사건이 세조에게 알려져서 혁파되었다는 주장이다.219)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震檀學報≫34·35, 1972·1973).

 성종 19년 이른바 「유향소 복설절목」에 의거, 새 모습으로 복설된 유향소는 鄕射堂과 같은 시설의 확충, 조직의 강화, 향안의 작성, 향규의 제정과 함께 수령 치읍의 보조기관인 군현의 「貳衙」로 정비되어 갔다. 당초 사림파가 의도했던 방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권 주도로 나가게 되었다. 그것은 戊午士禍를 계기로 훈구세력이 명종조 말까지 계속 집권했기 때문이다. 유향소의 임원에 관해서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후기의 읍지에 의거하여 조사해 보면 좌수는 읍격에 관계없이 1읍 1인이며 별감은 주·부는 3인, 군·현은 2인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유향소는 조선 후기에 오게 되면 향청 또는 향소라 부르게 되었고 그 조직과 권한은 시대 또는 군현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柳希春의≪眉巖日記≫에 의거한 유향소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방에서 상경 종사한 사림이나 훈구계열의 재경관인들 할 것 없이 다 같이 각기 연고지별로 관품에 따라 최고 8향에서 최하 2향의 경재소에 참여하면서 각기 그 읍의 유향소나 경저(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둘째, 각 읍의 유향소 임원(鄕任)의 임면권은 전적으로 경재소에 품신하여 결정되었다. 향임의 선정은 鄕望을 가장 존중했던 것이며, 향망은 향안에 등재된 향중 인사들의 공론에 의해 좌우되었다. 경재소 임원이나 향임을 맡고자 하는 자도 모두 향망에 의거, 선임되기를 희망하였다.

셋째, 경재소와 유향소 사이에는 임원 선임문제를 두고 갈등과 분쟁이 야기되었고, 경재소 임원 사이에도 유향소 임원의 임면문제를 두고 서로 친소나 이해관계가 얽혀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재소가 존재했던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의 임원 임명권과 주요공무의 결정권이 경재소에 귀속되어 있었고 향안이나 향규도 경재소의 승인을 받아 확정했으며, 유향소의 기타 권능 가운데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사전에 경재소의 결재를 요했으니 초기의 유향소는 완전히 경재소의 장악하에 놓여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220) 李樹健, 앞의 책(1989), 331∼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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