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5. 지방자치적 기구
  • 3) 향촌 제규약과 좌목

3) 향촌 제규약과 좌목

 조선시대 향읍 또는 향촌사회에는 그 구성원이나 단체의 조직체계와 운영상 갖가지 내부 규약과 각종 조직체의 명부인 座目들이 있었다. 그러한 규약에는 향규를 비롯하여 향약·동약·계약 등이 있으며, 좌목에는 향안과 동안 및 각종 계안 등이 있었다.

 유향소의 임원은 경재소가 그 읍의 유향품관이나 향중인사 가운데 鄕望이 높은 자를 선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향임에 선임되는 자는 반드시 향안에 등재된 사람이어야 했다. 즉 국초 이래 군현에 따라 그 향읍을 영도할 수 있는 문벌과 학덕을 갖춘 사족의 父老·子弟에 의한 조직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조직은 고려 이래 각 邑司를 구성했던 향리의 壇案(향리안)이나 후대의 각종 鄕紳錄과 같이 조직 참가자의 명부, 즉 향안(지방에 따라 鄕座目·鄕錄·鄕彦錄·鄕籍·靑襟錄 등으로 호칭)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의결기관이면서 향사·향음주례·春秋講信·경로례·향약독회 등의 거행과 기타 친목의 장소이기도 한 향회 또는 사무소이면서 공동의 집합장이기도 했던 향청(鄕射堂·鄕所)을 갖고 있었다.

 최근 향안과 향규에 관한 일련의 연구에서 조선시대 향촌사회는 향약이 보급되기 전인 15세기부터 지방유력자들에 의한 자율적 조직체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는데 향안은 그 구성원의 명부이며 향규는 그 규약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연구에서는 향규를 향약과 동일시 했던 종래의 연구를 비판하고 향약의 보급에 앞서서 유향소와 향안을 규제하는 향규가 있었음을 밝혔다.223) 田川孝三,<李朝の鄕規について>(≪朝鮮學報≫76·78·81, 1975∼76).
―――,<鄕憲と憲目>(≪鈴木俊記念東洋史論叢≫, 1975).
金龍德,<鄕規硏究>(≪韓國史硏究≫54, 1986).
이러한 향규는 향안 작성과 함께 여말 이래 재지사족들에 의한 유향소가 설치 운영되자 군현별로 서서히 제정되어 갔던 것이며 향약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전부터 유향소의 설립과 동시에 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향규는 종래의 香徒관계 규약과 함께 실시되어 오다가 중국의 향약이 보급되자 종전의 불교적이고 음사적인 의식과 관습이 주자학적 실천윤리로 대치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향규의 향약화 현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최근 향규관계 자료들이 계속 공간되면서부터 더욱 밝혀지고 있다.

 향안에는 이른바 世族이어야 입록될 수 있었다. 즉 군현토성에서 상경 종사하였다가 낙향한 가문, 토성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 및 타도·타 읍출신 사족으로 이주하여 벼슬·학문 덕행을 갖춘 가문이 향안에 들 수 있었다. 대소과에 응시하거나 仕宦上의 서경에서 결격사유가 없는 그런 가문이 1차 대상이 되었으며, 부계를 비롯하여 외계와 처계에 하자가 없는 가문이어야 했다. 따라서 향안 입록여부에 따라 「鄕內」(향안 가입자)와 「鄕外」로 나뉘어지기도 하며 군현에 따라서는 향외가 문벌상 향내를 압도하는 예가 많았다. 반향과 대읍에는 大姓 명문이 많아 향안 입록이 그만큼 정선되었지만 세족이나 재지사족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벽읍이나 서북 양계지방에는 家格이 떨어지는 향품·한족들이 향안에 입록되기도 하였다.224) 田川孝三,<鄕案について>(≪山本博士紀念東洋史論叢≫, 1973).
金仁杰,<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金哲埈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성리학적 향촌질서의 정착과 재지사림의 성장에 따라 향사당을 세우고 향안을 작성하여 그 입록자에 한해 유향소 임원이 되게 하였다. 군현 내지 향촌지배세력이 이족에서 사족으로 대체되어 갔듯이 종래의 講武·習射장소로서의 향사당은 유향소와 결부되면서 향사·향음주례·향약독회 등을 수행하는 장소로 발전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군현 병사들의 강무당 내지 養武堂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향안은 경재소·유향소의 설치와 거의 동시에 작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군현에 따라 현저한 지속의 차이가 있었다. 조선왕실의 풍패향인 영흥과 함흥부에서는 벌써 세조·예종 연간에 작성되었고 안동·진주·상주·나주·밀양·김해·예천·청도·함안 등 재지사림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던 반향이나 재지사족이 강성했던 삼남의 대읍에는 성종 19년 유향소 복설과 함께, 그리고 기타 일반 군현에서는 대개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작성, 비치되 었던 것이다.

 유향소의 조직과 임원 선정, 향임의 직무와 권한, 향촌교화 및 향안의 입록 범위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 향규이다. 즉 향규는 유향소의 임원 또는 구성원에 의하여 立議 또는 完議 형식으로 의정된 것이며, 유향소의 발전과 함께 규약의 내용도 점차 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동안이 갖추어진 뒤에 동규 또는 동약이 마련되듯이, 유향소가 설립·운영되고 향안이 작성됨에 따라 유향소와 향안을 규제할 향규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李民寏은 그가 제정한 의성현의 향규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향규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유향소를 규제하는 것이다. 향규가 향규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제하는 주체는 바로 유향소이다. 鄕風의 美惡은 향규의 行不行에 달려 있고 향규의 行不行은 유향소 임원의 賢不肖에 달려 있다(≪嶺南鄕約資料集成≫題義城鄕規後).

 향규는 바로 유향소를 규제하는 규약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유향소가 독자적으로 설치·운영되었듯이, 효령대군(補)과 李滉 등에 의하여 규정된 향규는 본래 중국의 향약과는 관계없이 유향소의 설립, 향안의 작성과 함께 구체화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향규는 크게 세 갈래로 내려 왔다고 생각되는데, 첫째는 효령대군에 의해 성안된 함경도 제읍의 향규, 둘째 영남지방에서 유래된 것이 이황에 의해 체계화된 禮安을 비롯한 영남지방의 향규, 세째 향약을 가미한 李珥의 海州一鄕約束을 비롯한 일련의 기호지방 향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16세기 말에 오게 되면 모두 주자의 增損呂氏鄕約을 典範으로 한 향약의 범주 안에서 향규를 보려는 데서 전래의 향규가 모두 향약화되고 말았다. 선조 8년 동·서 분당을 계기로 사림이 분열되자, 남인 또는 영남학파의 세계에서는 이황의 향규·동규·족계를 모범으로 한 향약이 경상도지방에 자리잡게 되었고, 기호지방에서는 이이의 향약을 전범으로 간주했던 것이며, 효령대군의 鄕憲을 전승한 서북지방은 관권의 영향으로 기호지방과 같이 이이의 것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15세기 이래 재지세력들에 의한 활발한 향촌 개발과 함께 동성촌락의 발달은 다시 동약·동안의 보급을 가져왔다. 이러한 향규나 동약·족계 등은 기본적으로 재지사족 상호간의 상부상조를 통하여 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지배 하에 있던 하층민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225) 鄭震英,<朝鮮前期 安東府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1985).

 향약은 본래 송대의 藍田呂氏가 창안한 향촌자치에 필요한 4개 덕목과 상호협조 등을 규약한 것으로 뒤에 朱子의 증보에 의해 더욱 완비되어≪朱子大全≫·≪小學≫과≪性理大全≫에도 실려 있었으므로, 향약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주자학의 전래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또한 여씨향약은 주자가 편집한≪소학≫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소학≫교육의 보급과 함께 15세기부터 사대부계층에 수용되어 갔다. 이러한 향약은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향촌사회에 보급시키려 했던 사림에 의하여 영남지방부터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향약은 유향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는 했으나 유향소와 같은 행정기구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향촌자치의 규약이었다. 이는 군현을 단위로 한 것도 있지만 지방의 사정에 따라 적용의 범위를 좁혀 향(면)약·동약·동계·족계 등으로 축소화된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같이 향약은 그 지방의 사정에 알맞게 짜여진 규약에 의하여 제정되었으나 그 내용은 여씨향약에서 보이는 德業을 서로 권하고 過失을 서로 규제하고 禮俗을 서로 교환하고 患難을 당하면 서로 구출한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른바 권선징악의 상부 상조를 골자로 하는 향촌의 규약이었다.226) 田花爲雄,≪朝鮮鄕約敎化史の硏究≫(鳴鳳社, 1972).

 향약을≪소학≫교육과 함께 유교의 이상정치 실현의 수단으로 간주한 趙光祖 일파는 중종 13년(1518)에 향약을 대량 발간하여 전국에 반포하고 그 실시를 권장하였다. 향약은 기묘사화(1519)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가, 중종 38년 왕명에 의해 지방에 따라 간헐적으로 다시 실시된 적이 있었다. 향약 시행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선조 초에 제기되었다. 거듭된 사화 끝에 마침내 사림이 중앙정계를 장악하게 되자 그들 가운데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당장 실시하자는 주장과 敎民보다는 養民이 앞선다는 전제 하에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킨 뒤에 실시해도 늦지 않다는 신중론이 맞서고 있었다.

 향약의 임원은 都約正·副約正·直月 등이 있으나 이들은 대개 유향소의 좌수·별감·유사 등이 겸하기 마련이어서 향청과 그 조직체계를 거의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약은 때로 임원들의 권리남용과 자체 내의 상호 이해 충돌과 모함 등으로 오히려 풍속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유교적 도덕을 선양하고 향촌자치 정신을 일깨우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향약과 함께 민간에는 촌락단위로 동계·향도회가 있었다. 사실 향도는 고려 이래의 祈佛단체인 동시에 향촌공동체로서 이른바 음사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향약은 중종 13년 이래 비로소 소수 사림세력에 의해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간헐적으로 시행되어 왔다면, 향도와 향도계·향도회는 세종 5년 12월 知順安縣事 朴甸의 진언과 같이 ‘마을마다 사림마다 모두 향도를 맺어’ 會飮·매장 등 촌락주민의 공동체적 행위를 수행했던 것이다. 촌락의 수호신에 대한 祀神 행위를 통해 결속되는 향도는 농촌사회에 있어서 공동노동인 「두레」와 養生送死에 관한 상호협조인 喪葬契 및 기타 각종 계와 관련하여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촌락민 중심의 각종 결사는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양반지배 체제하에 편찬사료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사실 마을마다 존재하였다.

 향약이 위로부터 또는 사족 중심의 규범적인 자치규약이라고 한다면, 밑으로부터 자연적 또는 혈연적인 특수 이익을 토대로 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는 契가 있었다. 이는 과거부터 내려오던 자치조직으로 조선시대에도 널리 유행하였다. 향약이 유교적인 권선징악, 化民成俗 등을 힘써 행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라면, 계는 「香徒」와 같이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상호부조, 「寶」와 같은 存本取息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대개 촌락단위의 소규모적인 것이 많았고 때로는 동계·통계와 喪布契·군포계 등 특수계도 많았다.

 촌락을 단위로 하는 규약인 동약은 향약의 하부조직으로서 향약과 거의 동시에 실시되었다. 동약도 향규·향약의 보급과 동시에 발전하였다. 이황의 출생지인 예안현 溫惠(溪)洞에서 그의 문중이 중심이 되어 온혜동약을 제정 실시하자 그의 문인들은 제각기 거주하는 동에서 동약을 개별적으로 제정·실시하였다. 때마침 사족의 동성촌락이 도처에서 형성되자 그들에 의한 동약·동안이 마련되었다. 현존 동약과 동안은 대체로 그 지방을 대표한 명문거족들의 거주지와 일치하였다. 15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제정·실시한 동약 중에서 奈城(李弘準, 1510년경)·溫惠洞(李滉)·河回洞(柳成龍)·良佐洞 등의 동약이 가장 유명하였다. 이러한 동약에는 향약의 4개 덕목 가운데 「患難相恤」에 가장 큰 중점이 두어졌다. 당시 향촌생활에서 水火災難과 기한·질병 및 상장에 관한 상호협조가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각 지방 동약에는 초상과 장사에 대한 부의·擔持軍·酒食제공 등에 관한 규약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향촌의 제규약과 좌목문제가 지방통치와 무관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관치행정면에서나 향촌자치적인 면에서 직접·간접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궁극적 지향점이란 결국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의 치읍·치민에 있어 官長과 政令에 대한 주민의 순종과 협조, 효과적인 징세·조역, 농민의 생산성 향상과 민생 안정 및 재지사족들의 하층민 지배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향규·향약·동약이 각기 그 내용과 기능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유교적인 윤리에 입각한 화민성속에 목적이 있는 것이며,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양반지배 체제의 유지 강화에 역점이 두어졌던 것이다.

<李樹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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