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1. 초기 군사제도의 정비
  • 2) 초기 지방군제의 정비
  • (3) 익군

(3) 익군

 동·서북면의 지방군 조직은 고려 이래의 「翼軍」 조직으로 대표된다. 익군 조직은 고려 초기의 州鎭軍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고려 말 공민왕 7년(1353)에 국경지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적 기능이 강한 지역 단위별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국경지대를 요새화하는 동시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다.249)≪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7년 6월 계미.

 그래서 西京軍民萬戶府·安州軍民萬戶府 등을 설치하고 상만호·부만호 등을 임명하였다. 그 후 紅巾賊의 침입과 대명관계의 성립 등으로 원과 대립하여 장차 東寧府의 정벌을 단행하려던 공민왕 18년(1369) 11월 서북면이 서경 만호부의 좌익·우익·전군·후군·정예·충성·신첨·신성 등의 10군을 비롯하여 각 국경지대의 요지에 역군을 두고 상만호·만호를 두었다. 따라서 익군 조직은 일정한 지역에 軍翼을 두고 이것을 합쳐 하나의 군사단위로 삼은 데서 비롯하였다.

 서북면에서도 이 익군 조직이 조선조 건국초기에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태조 원년(1392) 9월 당시의 익군 조직을 보면 평양의 10익, 안주의 10익, 의주의 4익 등 24개의 규모였다.250)≪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기해. 그러나 당시 서북면은 전반적인 인구를 파악할 수도 없을 만큼 그 행정력이 약했으며 동북면은 강역조차도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래서 태조 6년(1397) 12월에는 정도전을 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파견하여 순무하게 하였다. 이 때에 永興道·吉州道가 정해지고 지방 행정단위가 마련되어 관원이 배치되는 동시에 각 관별로 익군 조직이 이루어졌다.251)≪太祖實錄≫권 12, 태조 6년 12월 경자·권 13, 태조 7년 2월 경진.

 이와 같이 익군체제가 동·서북면에서 정비된 것은 태조 6년 이후이었다. 따라서 남방의 여러 도가 시위패 이외에 영진군을 갖게 될 무렵에는 이 지역에서는 시위패와 익군이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북방지역에서의 익군은 남방의 영진군과 같이 영진별로 분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군과는 달리 각 익에 소속되어 군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익군 조직은 동·서북면을 막론하고 보다 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바뀌어졌다. 즉 서북면과 동북면의 모든 지역을 軍翼道에 분속시키는 조치가 처해진 것이다. 서북면인 평안도는 세종 6년(1425) 6월 각 익의 소속 군현을 재조정하여 평양·안주·의주·삭주·강계의 6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인근 모든 지역을 이 군익도에 분속시켰다.252)≪世宗實錄≫권 24, 세종 6년 6월 병진. 또한 동북면은 이듬해 2월에 함흥·영흥·길주·경원의 4개 군익도로 나누고 각 도를 중·좌·우의 3익으로 나누어 편성하여 국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253)≪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경신. 평안도는 5도 20익, 함경도는 4도 12익으로 편제되었으며≪세종실록지리지≫에는 평안도의 안주도 대신 寧邊道로 개편되어 있다.

 이러한 익의 책임자는 모두 행정책임자가 각 군익의 군사직까지 겸하였기 때문에 행정책임자의 계급에 따라 병마절제사(2품)·병마단련사(3품)·병마단련부사(4품)·병마단련판관(5·6품)이라 했는데 가령 평안도 의주목사는 義州道中翼兵馬節制使를 점하는 따위이다.

 이와 같은 북방에서의 군익도 설치는 전통적 국방지대인 이 지방에 각 도별로 병마도절제사가 있기는 하지만 전지역을 몇 개의 군사지대로 다시 나누고 이들 각 군익도는 구체적 군사행동상의 단위를 이루어 사태에 대처하 도록 한 것이다.

 또 주력인 역군은 남방의 영진군과 비슷하지만 영진군이 番次에 따라 징발되었을 때 각 진에 가서 복무하였지만, 전자는 거주지가 곧 복무처였고 따로 징발되지 않더라도 항상 군인이었던 것이다.254) 閔賢九, 앞의 책, 236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